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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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처음시기의 철학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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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기의 철학

 

 

1721년[33세]여름, 암스텔담에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스웨덴에서 라틴말로 옮긴 논문 세 편이 인쇄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화학」을 다룬 것이었다.

 

그가, 그 논문들을 이름을 밝히지 않고 숨긴 이름(익명)으로 낸 것은, 아마도 글쓴이의 이름을 밝혔을 경우보다 편견 없는 평가를 바랐기 때문이었을까. 하여튼 그는 그것이, 질이 좋은 종이에 찍혀 세상에 내놓게 되자, 곧바로 2부를 오란다 에 있는 친구에게 보냈다.

 

 

라틴말로 된 기증본 중에서 한 권은 영국에 있는 박물관에 보존되었는데, 거기에는 『온 세상에서 널리 창의(創意)와 깊은 학식과 경험에 대한 칭송을 받는, 헬만 베엘하브 교수에게 드림』이렇게 씌어 있다. 다른 한 권은 하그 주재 스웨덴 대사 요하킴 후레데릭 프레이스에게 보냈다. 그 대사와는 몇 년 전에, 우트렉트 평화회의에서 알게 되어, 스웨덴의 경제 상태와 모국의 복지를 늘려 나가는 길에 대하여 오래도록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암스텔담에서 레이덴으로 가서 베엘하브 교수를 찾아보고, 앞으로 출판할 것들의 도움이 될 재료를 이름 있는 대학에서 모았다. 그러고 나서 암스텔담으로 돌아와서 헷세리우스를 다시 만났다. 12월 8일, 그 두 스웨덴 사람은, 21년에 걸친 스웨덴과 러시아와의 싸움이 끝났음을 알리는 평화조약을 맺은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만났다.

 

 

이때 페테로 대제의 대리자는, 암스텔담 시민에게 굉장한 잔치를 베풀어서, 그것은 새벽까지 계속 되었다. 거리에서는 술통을 열었고 또, 아주 화려한 불꽃을 쏘아 올려서, 사람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이 행사를 위하여 강가에 세워진 큰 독수리가 얹힌 높은 탑에서는, 군악대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서, 불화살과 풍선 총을 쏘았다.

 

 

스베덴보리는 이 행사에 감동하여, 피곤하기 기운이 빠진 스웨덴에 찾아든 평화를 축하하여, 시를 몇 편 썼다. 바야흐로 고국에서는, 앞서 흘렸던 피를 대신하여 아름다운 술이 흐르고,『싸움의신(軍神)은 사슬에 묶이고, 박카스가 몸치장을 한다』는 시귀절 그대로 이었다.

 

 

암스텔담에서 나그네 두 사람은, 에익스 라 샤펠과 리에이지로 갔다. 그 나라의 켜가 진 산은, 연구자인 두 사람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였다. 리에이지에서 헷세리우스는 그의 연구 때문에 돌아가고, 스베덴보리는 코론을 거쳐 라이프치히로 갔는데, 도중에 근처에 있는 광산 지구를 찾아보았다.

 

 

4월 초순에, 그는 「갖가지 관찰」이라는 전반적 표제 하에, 과학에 관한 여러 주제를 다룬, 3부로 된 논문을 출판하였다.

 

그는 그것을 새로 임명이 된 광산국 총재, 구스타흐 본데 백작에게 드렸다. 라이프치히에서 삭소니, 하르쯔 산, 부른스윅에 있는 모든 광산을 찾아보고 조사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부랑겐부르그를 다스리고 있는, 루드윗히 루돌프 대공(大公)의 특별한 환대를 받았다. 대공은, 그에게 금메달과 커다란 은으로 된, 커피포트를 선물하고, 스베덴보리의 여비 부담을 모두 맡겠다고 하였다. 그달 끝 무렵, 스베덴보리가 「갖가지 관찰」의 제 4부를 출판하였을 때, 그 책자를 대공에게 바쳤음은 당연한 일이다.

 

 

바야흐로, 스베덴보리는,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1722년 [34세]의 첫 무렵, 유럽학계에서 명성을 바랐던 그의 꿈이 실현 되었다. 유럽의 지도적인 평론잡지인 라이푸치히의 [학계회보(Acta Eruditorum)]은 공간된 그 논문을 차례차례로 들어서 평론하였는데, 자연현상의 원인을 결정하려고 기하학을 응용한 스베덴보리의 이론을, 긴 문장으로써 높이 값 매김 했다.

 

 

그런데도, 이 처음의 평론은, 아래와 같은 말로 그 논지(論旨)를 끝맺었다.

 

 

『지은이는 위대한 창의와, 거기에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그 이론에서, 얼마만큼 진리에 이르렀는지는, 다른 이들의 판단에 맡기자.』

 

 

스베덴보리는 이탈리아에도 가기를 바랐지만,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받고서, 그 생각을 바꾸었다. 스베덴보리 어머니의 큰 아버지인 알부레 슛 데 베엠 선장은 어마어마한 땅을 남겼는데, 그것을 베엠의 유능한 자매인 부리타가 관리하였다. 상속인 중의 몇 사람이, 요자음, 그 땅을 나누는데 승복할 수 없다고 재판을 걸었는데, 그것이 다가오자, 스베드베리 감독은 임마누엘이 그것을 모면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여행을 그만두고 1722년[34세]7월 초순에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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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와 그 때의 학계와의 관계를 알려면, 철학의 역사를 얼마쯤 훑어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의 이론체계의 원천을 찾아내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물질의 기원은, 그때에도 결코 일반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내지는 못하였다. 우리가 얻은 자료를 어떻게 처리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해서 다시 얻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늘 대중의 관심을 일으켜 왔지만, 그러나 물질이 어떻게 하여 생겨났느냐 하는 물음은, 얼마 안 되는 사색가(思索家)에게 맡겨 놓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여러 세기 동안 내려온 대답이었으며, 단순하게 경건한 이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핵분열 충격으로, 이 세대의 게으른 마음은, 실제로는 철학자들을, 또 철학자들이 자연의 내부 구조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에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고대인(古代人)은, 기원의 문제에 달려 붙었으며, 그 생각(思索)이 현대의 견해의 기초가 되었다. 원바탕은 모두 처음에는, 뚫을 수 없는 분자에서 구성되었다는 생각은, 그리스 사람에게서 일어났다. 데모크리토스는 이것에 「아톰(원자)」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우주 - 커다랗고 텅 빈 영역 또는 진공 속을 움직이고 있는 원자로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물질은 한 종류의 같은 질의 것이다. 다만 그 꼴만이 여럿이다』고 하였다. 그것은 전혀 순수하고 사변적인 것이요, 주로 이론과 추측에서 생겨났다.

 

 

스베덴보리가 살던 시대에서는, 아톰의 생각은 데칼트를 따르는 이와 뉴톤에 의하여 두 개의 서로 다른 쪽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데칼트에게는, 우주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를 풀어 밝히는데 는, 그것은 모두 운동(motion)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어야만 했다.

 

 

이 맨 처음의 운동으로 소용돌이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이 운동에 의하여, 그는 태양계가 생겨난 과정을 설명하고, 붙박이별 또는 해가 강렬한 운동을 지닌 아주 작은 많은 분자의 중심이 되어 있다.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을 그는 조잡한 종류의 분자가, 그 분자 자신의 특수한 운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진공 같은 것은, 데칼트에겐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분자 사이의 진공은, 모두 영원히 더더욱 미세한 분자에 의하여, 갑자기 내부를 채우기 때문이다. 그는, 맨 처음엔 오직 한 종류의 물질 밖에 있지 않았는데, 그것은 「넓어짐(extention)」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질의 모든 다양성과 또 힘이 모두 다른 것은, 운동에 의존한다고 그는 말했다. 맨 처음의 물질 분자가 서로 부딪히면 그 모는 떨어져 나가고, 그리하여 두 번째 종류의 분자가 어떤 모양을 이룬다. 떨어져나간 그 모는 『불의 분자』의 미세한 가루가 되었고, 그것이 붙박이별(항성)이 되었다. 『나에게 넓어짐을 주어라. 그러면 나는 세계를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는, 데칼트의 말이다.

 

 

그 운동의 법칙은, 부분적으로는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많은 새로운 사색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것은 미립자 또는 빛의 방출설(放出說)을 파하고, 빛은 에텔의 파동이라는 후대(後代)의 이론에 길을 열었다.

 

 

데칼트의 소용돌이 설(說)은, 스베덴보리가 살던 때에는 영국을 빼고서는 어디에서나 받아들여졌지만, 영국에서는, 뉴톤이 물질적인 분자에 관한 다른 생각을 펴고 있었다.

 

 

그 이론은, 데칼트의 것과는 맞선 견해로,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처음에, 바탕이 단단하고, 일정한 꼴을 가진, 뚫을 수 없는 움직이는 분자에 의하여, 결코 닳아 없어지거나, 수만 개의 조각으로 부서지지 않을 만큼의 단단한 분자로써 물질을 만들었다. 하나님 자신께서 맨 처음의 창조에서, 하나의 물질이 되게 한 것은 보통 힘으로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뉴턴은 과학의 향상에 더없이 필요한 실험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빛에 관한 그의 생각은, 그것은 물질적인 분자, 또는 빛을 띤 작은 알갱이(미립자)로 이루어지고, 그 작은 알갱이는 광체(光體)에서 직선으로 나와서, 그것이 망막에 기계적으로 작용하여 보기감각(시각)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광선은 빛나고 있는 원바탕에서 나오는 아주 작은 폼이 아닐까』라고, 그는 묻고 있다. 뉴톤의 단단한 분자는 진공 속을 움직인다고 가정하였다. 이것이 중력은 천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그의 획기적인 법칙이 쉽사리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이유였다. 천체가 진공 속에서, 먼 곳에서부터 서로 작용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로 여겨졌다.

 

 

스베덴보리가 뉴톤과 데칼트와의 관계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크리스토퍼 포르헴의 영향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포르헴 자신의 이론은, 물질은 운동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라는 데칼트와 일치한다.

 

『자연에서 창조적인 힘은 하나님이고, 그 매개체는 운동이다.』포르헴은 여러 종류의 분자를 인정하였는데, 그 모두는 둥근꼴이었다. 모든 생물의 밑바닥은 『비길 데 없이 작고, 살아 있는 분자, 또는 작은 알맹이 할 것 없이 그 꼴과 크기는, 운동이라고 이름이 붙여지지 않는 한,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어쩌면 데칼트의 생각 중에서 많은 것은, 실험 결과, 바꾸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포르헴은 생각했다. 그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자연의 특성은 모두 수학과, 역학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생각과 닮은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스베덴보리는, 데칼트와 뉴톤 사이의 근본적 대립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의 초기의 입장은 포르헴의 입장을 뚜렷하게 닮고 있다. 그는 스승인 포르헴 처럼, 뉴톤이 말하는 빛의 미립자 설을 아니 여기고, 그 진공과 먼 데서 걸려오는 작용을 물리쳤다. 그는 소용돌이에 대해서나, 분자는 운동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틀이 잡힌다는 데칼트와 일치하였다. 그래서 그는 버릴 것과 취하여야 할 것을 분별하면서, 그 개념을 넓히면서 제 갈 길을 나아간 것이다.

 

 

암스텔담에서 출판한, 일반적으로 《화학》이라고 부르는 논문은, 스베덴보리 혼자의 생각에서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이 저작을 독특하게 하는 것은 『자연적인 물질은 모두 기하학과 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그의 새 생각을 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류가 많고, 그 양식이나 모양이 여러 가지인 『자연의 특성』은 물질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분자의 꼴과 크기에 의전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중심적인 생각을 그 표제의 페이지에 내보이고 있는데, 거기에는『자연철학의 원리를 다룬, 앞장 선 저작, 화학과 물리학의 현상을 기하학으로 풀어 밝히려는 새로운 기도(企圖)를 담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는 그 머리말에서 『물리학과 화학은 무엇인가』고 묻고 있다. 『그 성질은 특별한 얼거리(기구)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자연 안에는 기하학적이 아닌 새로운 무엇이 있을까. 실험이 여러 모양새는 분자의 자리. 꼴. 무게. 운도의 여러 모양새(다양성)가 아니고 무엇일까.』 여기에 모든 것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스베덴보리는, 원자의 구조에 관한 오늘날의 실험으로 철저히 그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마당에, 우리가, 그가 올바른 길에 서 있었다고 말하기를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그를 이어온 한 세기 동안, 과학의 진보로 발견된 것은, 물질의 특성 사이의 관련은 기하학적인 배치에 의존한다는 제언(提言)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할 것은, 스베덴보리 이론의 단일성과 단순성은 언제나 한없는 창조자라는 생각에 끌어 붙어져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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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레데릭 왕과 엘레오노라 여왕,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또 심히 망한 왕권을 되찾기 위해서도, 예부터 내려오는 스웨덴의 습관을 다시 살려서, 왕국의 모든 곳으로 아주 화려한 여행을 계속하여, 신하들을 만나서, 그들의 청원을 듣기로 하였다.

 

 

1722년[34세] 7월, 왕과 왕비는 베텔 호숫가에 있는 어떤 유명한 광천(鑛泉)에 들러서, 거기서, 모인 상류사회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 에릭 벤세리우스가 아내인 안나와 함께 들렀고, 후에는 스베드베리 감독 자신과, 외국에서 갓 돌아온 스베덴보리도 찾아왔다. 그는 스톡홀름에 가는 길에 들른 것이다.

 

7월 18일은 왕의 명명일(命名日)이어서, 거기에서는 스포츠. 댄스. 잔치 맡은 일들이 벌어져서, 스베덴보리도 이날을 축하하여, 좀 화려한 시를 지어서 바쳤다.

 

 

그는 또 한 청원을 냈다. 그가 외국의 채굴법을 배우고 나서, 곧바로, 특히 구리를 녹이는 방법을 고쳐야만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왕에게, 시험에 따르는 모든 위험은, 자기 혼자서 감당하고자 하니, 그 시험을 실시할 권리를 자기에게 줄 것을 청원 하였다.

 

 

8월에 스베덴보리는 스톡홀름에서 브리타 베엠의 유산을 나누는 일로, 그의 큰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리타 베엠은, 그 거리 한가운데에 있는「로세나드레루 궁전」이라고들 부르는 큰 저택에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큰 마님으로서 화려한 생활을 보냈고, 또 사업에도 재빠른 재주를 가진 부인이었다.

 

 

스베드베리 감독이 국회에 제사계급의 한 사람으로서 스톡홀름에 머물 때에는, 브리타 자매와 그의 사촌 아들의 환대를 받았다. 감독은 잘사는 이 홀어미를 위하여 적당한 혼인자리를 알선하고자 했지만, 브리타는 죽을 때까지 죽은 남편인 요한 슈베드 교수에게 정조를 지켰다. 그 여자는 열네 살밖에 안되었을 때에 웁살라에서 그 교수와 혼인을 맺었다. 그 여자는 베엠의 땅을 관리하여, 그 상속인 모두에게 막대한 이익을 끼치긴 했지만, 그 수고를 갚는 인사로, 그의 가족은 그 여자와 또 가족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스베드베리는 의리 없는 일이라고 한탄했다. 만약 그 여자 말고 다른 이가 그 땅을 관리했다면, 그 상속인들이 그토록 좋게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임마누엘이 큰 어머니와 합의를 하여서, 법정에서 다투는 일 없이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올바른 것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스베덴보리는, 그 형제와 자매들의 몫을 사들인다고 하는 것으로써 합의에 이르렀으며, 그리하여 스톡홀름 북쪽 백 마일에 있는 보드니아 만을 향한 악스마르에 있는 철공장의 1/5은, 임마누엘의 것이 되었다.

 

 

10월에, 광산국은 구리를 녹이는 새 방법을 시험하는데 대한 스베덴보리의 요청을 왕이 허락하여, 그것을 화룬에 있는 광업방면의 당국자에게 보냈다.

 

 

그 요청에는, 그 시험을 설치할 때에,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그 시험에 가장 알맞은 땅을 그가 고르게 하고, 아주 숙련된 녹이는 이와 불 때는 이를 주고, 광부들을, 성실하게 일한다는 서약으로 얽어매고, 첫해에 늘어난 수입과 그 이후의 이익의 사소한 부분을 스베덴보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도 담고 있었다.

 

 

화룬에서 온 화답은 미욱한 보수주의의 본보기였다. 녹이는 방법은 여러 세기를 거친 경험의 결과이며, 쇳돌 캐는 이가, 경험이 주는 교훈을 무시하고 『새로운 세공업 기술자』는 광산 당국자에게는 좋아할 수 없고, 귀찮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조건하에, 그 감사관에게 그 시험을 하게 하는데 동의하였다. 스베덴보리는, 자기는 보통의 녹이는 방법을 혁신하고 말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불, 풀무, 화로, 광석의 조건에 주의할 것을 조르고, 다른 방법에서는 연기와 찌꺼기가 되어 없어지고 말 위험이 있는 구리의 부분을 절약하는 것뿐이다, 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여전히 부정적이었으며, 시험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 같이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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