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생애와 신학사상

꺾임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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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임

 

 

스베덴보리는 벌써 서른 살이 되었고, 누구든지 혼인을 생각하는 나이였다. 그 때에 그는 제게 아주 잘 맞는 짝을 얻을 가망이 있었으나, 그 바람은 채워지지 않았다.

 

스베덴보리의 말을 따르면, 그는 언제나 이성에게 마음이 세게 끌리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도 혼인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이일에 대한 그의 말이 흐릿해서 전기를 쓰는 사람들 마음속에 여러 가지 억지 추측을 일으켰다. 그러나 독신의 고독 속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 주목할 만한 사실은 , 그가 이루어 놓은 놀라운 업적의 빛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연구와 광범한 여행의 외로운 생활 속에서 이룩한 업적은 만일, 그 생애가 가정의 번거로움에 묶여 있었다면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혼인을 원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 분명한 이유는 아리송하다. 그 하나는 스베덴보리가 아주 늙어서 덴마크에 있는 잘 아는 사람에게 말했다고 하는 것이다. 왜 당신은 한 번도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물음에 『 나는 한 번, 내가 젊은 무렵에 찰스 12세가 유명한 포르헴에게, 딸을 내게 주라고 권하였기 때문에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는 대답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느 딸이었나? 포르헴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언니 마리아는 성품이 좋은, 말하자면 틀에 잘 맞는, 가족과 사교면 에서 생생한 관심을 가진 여성처럼 생각된다. 그는 교회 일에, 집안일에 전념하고, 어머니가 맛있는 식사를 만드는 일을 돕는 것을 즐겨 했다.

 

동생 에메렌티아는 내성적이고, 깊은 생각에 골몰하기를 잘하는 학구적인 딸이었고, 그 주변 사람들보다도 시에 관심을 가졌으며, 아버지의 재능과 선량하고 건설적인 마음도 이어 받았다.

 

왕이 제안한 혼인은 아마 당시 23세였던 『언니 마리아와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동생보다 언니를 일찍 시집을 보내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혼은 결코 들어내지 않고 임마누엘 자신의 재량으로 그 일을 피한 것 같다. 이것을 바로 증명하는 하나 뿐인 토막으로 생각되는 것이, 왕께서 벤넬보리를 방문한 후에 얼마 안 되어서 스베덴보리가 거기서 벤세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인다.

 

『포르헴 씨의 맏딸은 만네스 트렘이라는 왕의 시종과 약혼을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손을 쓴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두고 무슨 말들을 하겠지요. 그 둘째가 내게는 훨씬 아름답게 생각됩니다.』(1718년 [30세] 9월 1일).

 

그의 의견은, 무텐사(에메렌티아)는 마야(마리아) 보다 훨씬 예뻤기 때문에, 만일 마리아를 다른 누구와 짝지어 준다면, 에메렌티아는 자기와 짝지어 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에메렌티아 포르헴과 혼인하고자 한 일이 왜 안 되었을까. 그 대답은 1789년 [그가 죽은 지 17년] 스톡홀름 협회 사람들 앞에 읽은 문서 중에 있다. 그 여자의 오빠인 가브리엘 포르헴이 거기서 말한 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트롤헷탄에서 스베덴보리를 조수로 삼고 물문을 쌓고 있을 때 『감사관은 포르헴의 둘째 딸에게 대단한 연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여자는 열다섯의 어린나이로 혼인을 약속할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아버지는 스베덴보리를 사랑한 나머지, 딸이 더 나이가 들면 더 다소곳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바탕으로, 장차 그 여자를 요구해도 좋다는 문서를 그에게 주고, 그 여자에겐 억지로 그 계약서에 서명 시켰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날마다 그 일로 상심하였기 때문에, 오빠인 가브리엘 포르헴은 동생이 가여워서 스베덴보리에게서 몰래 그 계약서를 없애 버렸다. 스베덴보리는 그 계약서를 날마다 꺼내어 보는 것이 단 하나의 위로와 기쁨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보물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잃어버린 스베덴보리의 슬픔을 무슨 말로 나타낼 수 있을까!

 

그 여자의 아버지는 그 원인을 끝까지 찾아내고자 하였고, 아버지의 권위로 잃어버린 문서를 그에게 돌려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그 여자의 슬픔을 알아차리자, 자진하여 그 요구를 철회하고 다시는 결코 어떠한 여인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리라, 하물며 약혼을 주고받은 일이랴.

 

그는 마음속으로 엄숙히 다짐하면서 그 집을 떠났다.

 

일반으로는 이렇게 믿고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혼인에 대한 생각을 그 이후로 아주 떼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로부터 수년 후에 그는 젊은 부인의 손길을 구한 것을 증명하는 글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84쪽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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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숨은 이야기는 어쩌면 1718년 [30세] 9월에 일어났다.

 

스베덴보리는 벤세리우스에게 편지를 쓴지 이틀 뒤에, 벤넬호수를 건너 부른스보에서 세 주간을 묵었다. 10월에 그는 이렇게 썼다.

 

『폐하께서 이번 달 마지막 즈음에 베넬보리에 가십니다. 내가 폐하와 함께 노르웨이에 멀리 치러(원정)가고 안 가고는 곧 알게 될 것입니다.』(부른스보 1718년 10월 15일).

 

12월에 임마누엘은 그냥 감독사택에 있으면서, 거기서 크리스마스 기간을 보낼 참이었다. 그 뒤에 광산과 스톡홀름에서 몇 주간을 보내려고 하였다.

 

『고맙다. 나는 노르웨이 원정을 벗어났다! 만약에 그것을 회피하려고 일을 꾸미지 않았다면 원정에 내 몰렸을 것이다.』 고 그는 12월 8일에 썼다.

 

그 뒤에 곧 그는 왕이 후레데릭스할의 포위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받았을 것이다.

 

중요길목(요새)의 외벽은 1718년 [30세] 11월 20일에 함락되고, 찰스는 성채 본거지 공격을 시작할 참이었다. 낮과 밤, 비에 젖고 추위에 떨면서도, 그는 참호에 묵으면서 매일 밤 2-3시간 밖에 잠을 못 잤다. 13일 새벽나절에 참호벽 위에 앉아 있을 때에, 총탄 한 개가 머리 뒤통수를 뚫고 지나가 그는 즉사했다.

 

 

그 주검은 1월 1일에 벤넬보리로, 거기에서 스톡홀름으로 옮겨져서, 거기 릿다르호름 교회에 엄숙하게 묻혔다. 이리하여 따르는 신하들에 대한 절대주권을 쥐었던 인간, 휠텔이 말한 『지금껏 지상에 나타난 적이 없는 가장 이상한, 또 가장 특이한 인물』이라고 한 인간이, 또 그의 전술의 천재성과, 남에게 귀를 막아버린 외고집 때문에 『북국의 미치광이』로 알려진 인간이 땅 위에서 사라졌다. 찰스의 관은 열려져, 그의 몸은 몇 번에 거쳐서 검사했으나, 그의 목숨을 빼앗아간 총알이 포위된 성채에서 쏜 것인지, 아니면 왕의 군대 중의 반역자가 쏜 것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노르웨이 원정은 군대 사이에서 결코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더 일주일 동안 싸움을 계속 했다면 중요길목은 떨어지고 싸움을 끝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관들은 포위를 풀고 군대를 철수시키는 쪽을 택했다. 그들은 새 왕이 등극할 때, 고국의 서울에 있으면서 장래의 지배자를 통한 계급승진을 위하여 그들의 머리를 굴렸다. 노르웨이 산꼭대기에서 겨울의 사납게 짖어대는 눈보라 속에 지도자도 없이 버려진 군대에 일어난 일은, 스웨덴 역사에서 가장 상처 깊은 것 중의 하나이다.

 

철수를 마쳤을 때, 얼어붙은 주검이, 바람에 얻어맞은 평원에, 좁디좁은 골짜기에 딱딱한 채로 서 있고, 실량, 대피소와 의복의 부족함을 기분 나쁘게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군속에서나 무장한 원정군에게도 똑 같이 내려덮인 처참한 철수였다.

 

저 위대한 우두머리를 마지막 쉼터로 보내는 사람들 중에 임마누엘 스베덴보리가 있었다. 그의 운명은 뜻밖에 일어난 변화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왕에게 강하게 끌렸다. 꼬박 한 해 동안, 단속적(斷續的)이었지만 그들은 거의 매일 접촉하였다. 이런 관계가 만약에 더 오래 이어졌다면 이 젊은이의 인생길을 결정하는 영향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흥미 있는 화제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는 공학상의 기술과 문필의 재능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는 왕으로 하여금 천체관측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해 보았으나, 그것은 실패했다. 천문학은 전사에게 하소연하기엔 너무나도 멀고 또 실제적이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는 『후대는 냉대로 변하고, 성을 내는데 까지 변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억지 추측을 낳았다.

 

그것은 임마누엘이 『다에다루스』를 폐하께서 바라는 대로 재빨리 발간을 못했다는 사소한 일이 아니었으며, 또 이 감사관이 포르헴의 딸과 혼인을 하지 못했다는 일이 아니다. 그 보다 더 깊게 있을만한 원인은, 스베덴보리가 노르웨이 원정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리라. 이에 대하여 그는 나중에 『고맙다. 나는 그 일을 피하였다!』고 외치고 있다. 아마도 그가 왕의 참 성격과, 완고하고, 불쌍히 여길 줄을 모르는 야망을 깨친 것이, 왕과 끊어지게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또 왕에게 찰싹 붙은 역귀(疫鬼)같은 에르쯔 남작과 티격난 데서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찰스 12세는 스웨덴 백성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세금 걷는데서 세금 맥이(과세)는 사랑을 받지 못했다. 전쟁이 온 국민에게 끼친 처절한 고뇌에 대한 보복의 생각은, 가증스러운 에르쯔에게로 엉겨 모였다.

 

왕이 죽고 나서 에르쯔는 잘못된 권고로 왕이 헤매게 했다는 죄명으로 곧 붙잡혀서 빠른 재판을 거쳐서 처형되었다.

 

물문(水門)의 일은 겨울에는 중지했지만, 다시는 그 일은 결코 진행되지 않았다. 후세 사람이 거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다른 곳에 현대식의 에타 운하를 지었다. 배가 물문을 빠져나갈 때, 행인들은 『포르헴의 물문』을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미완성으로 끝난 발굴의 흔적이 흥취를 자아낼 것이다. 모자라서인지, 일반 사람의 무관심에서인지 발행이 정지되었다.

 

스베덴보리와 크리스토퍼와의 관계는 이때부터 끊어졌다. 이 일도 젊은 과학자에게 깊은 고뇌를 주었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이 두 기술자의 불화를 암시하는, 오직 하나뿐인 것은, 포르헴이 벤세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이고, 그 중에 포르헴은 과학에 대하여 극히 날카로운 투철력(透徹力)을 지닌 젊은 감사관을 말하고 있다. 그는 저들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데에 마음아파하고 - 이 편지 세통은 뜯지 않은 채로 되돌려졌다 - 벤세리우스에게 일을 본디대로 돌이켜 줄 것을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포르헴집안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존경을 받고, 저들에게 『저들 자신의 아들로서 사랑하여야만 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고 씌어 있다 (칼르스그라흐 1719년 [31세] 4월 18일).

 

 

그러나 이들의 끊어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3년 후에, 스베덴보리는 그의 한 과학 논문에 관하여 포르헴의 생각을 묻고 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게 앞날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 막힌 기분이, 당시 『지구와 떠돌이별의 운동과 자리』에 대하여 낸 작은 지운 책 중에 반영 되어 있다.

 

이 논문 중에, 지구는 지금 해의 둘레를 전보다는 느리게 돌고 있어서, 마침내는 아주 황폐하여지고, 말 것을, 물리학, 기하학, 천체학 은 증명하고 있다. 지구는 운행속도를 줄이기 때문에, 인류의 보금자리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인류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 없어질 것이다.

 

 

그 환멸중의 크라이막스는, 임마누엘이 광산국에 나가서 봉급을 받을 자격이 있는 관리인지를 확인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을 때에, 찾아왔다. 그것을 광산국은 거절 하였다.

 

그가 특별한 일을 위하여 임명은 되었지만,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광산국이 뽑지 않은 임시고용직 신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바닥난 국고의 재정 상태에서는 무시해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 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스웨덴 광업의 복지증진에는 아무런 기여가 없었다. 더구나 그는 나라를 파멸시킨 왕의 사랑받는 신하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의연히 옛 체제의 열렬한 왕당파이다!

 

스베덴보리가 광산국에 의하여 거부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에게는 부당하게 생각 되었다. 그는 주요한 광산에 광범하게 여행하여, 그때 쓰이던 화로의 모든 종류에 대하여 보고서를 냄으로써, 이전에 아무 경험도 없었던 얼안(분야)에서 유용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였다.

 

『스웨덴의 용광로에 대하여』라는 그의 원고가 최근에 발견되어, 지금의 스웨덴 철광국은, 그 보고서에 그 원고를 인쇄하여 그의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스웨덴 전체에 걸쳐서 당시 사용되던 화로를 다룬 처음이며, 유일한 기사이며, 더구나 그것은 그에게 누구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그 나라에 있는 모든 곳의 주조소, 철공장을 친히 찾아서, 그것을 근거로 보고한 것이다.

 

지은이는 대장간, 숯굽는일, 제련자, 쇠가마 따위의 관리인에게서 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았다. 스베덴보리가 전혀 혼자서, 더구나 완전히 현대적인 정신으로써 시작한, 철저하게 과학적인 조사도, 그것을 받아들인 감사관과 평의원의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

 

그들의 태반은 아마 『더러운 쇠화로』곁에는 단 한번이라도 다가가지 않으면서, 욘 욘슨과 석탄쟁이 에릭 에릭슨과의 법률싸움에 엄숙한 차림새로 바르게 앉아 판결을 내리는 일에, 그의 활동력을 한정 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는 또 『광맥을 찾아내는 새 방법』이라는 작은 논문을 제출하였는데 거기에서 광석은 증발기운, 또는 발산 물질을 『내보내어』, 그것이 그 둘레의 땅에 스며들어, 땅 겉면의 식물을 물들게 (감염)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냥개처럼 알아냄으로써』보물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부르짖었다. 『만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지금보다도 10만 배나 더 정묘한 감각을 주셨다면, 틀림없이, 단지 냄새에 의하여 풍부한 광맥에서 내 뿜는 기운이 물처럼 흐르는 그 길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른 방법을 발명하는데 우리들의 이성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그것은 점(占)지팡이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점을 미신의 영역으로 격하하고 있다.

 

 

임마누엘은 그 때에, 아버지의 가장 좋은 글체를 상기시키는 말씀으로, 그 사대의 낭비를 슬퍼하여 『가장 좋은 광맥과 아주 뛰어난 광석은 낭비를 삼가서 수입과 지출이 일치하도록 유의하는 것이다』고 지적하여, 『우리들의 은광 산에서 일 년에 나는 양의 곱절이 넘는 금, 은으로 우리들의 몸을 치장하는 동안은, 새로 보배로운 재물을 찾아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하소연 하고 있다.

 

이 논문도 역시 건방진 광산국의 금실로 꼰 끈으로 머리칼을 엮은 간부들 사이에서 큰 반성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위엄이 있고, 굽히지 않는 목사의 아들은, 조금도 재미라고는 없는 패거리가 아니냐고 수상히 여겼으리라.

 

 

『광맥을 그 방사선으로 찾아낸다.』는 스베덴보리의 논문에 특별한 관심을 품는 일이 훨씬 더 현대의 과학자에게 맡겨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에 따르는 가장 이른 제안이 얼마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의 가이거(Geiger) *1) 계수관(計數管)에 얼마나 많은 흥미를 기울였을까!

 

이제 스베덴보리는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그는 이때, 죽은 천문학자 펠 엘비스의 뒤를 이은 웁살라 대학의 교수직을 그 스스로 던져버렸다.

벤세리우스가 열심히 권고한 것에 대하여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벌써 이름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이 나라를 섬길 수가 있으며, 정말 다른 자리에서 실제로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취미와 마음의 경향과 맞지 않는 교수직은 사양합니다. 나는 이 두 가지 면에 따라 공학에 이끌리고, 앞날에는 화학 쪽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다 광산국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감사관들을 끼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나는 그 결함을 메우고자 힘쓰며, 또 내가 그 방면에서 내 힘을 다하는 것이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의 애씀이 다른데서 도움이 되도록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또 그 누구도 내가 그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줄로 믿고 있습니다.』(부른스보 1718년 [30세] 1월 21일).

 

 

스베덴보리에게는 기력을 잃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포르헴 가족과의 관계에서 얻은 상처 말고도, 지금껏 갖고 있던 모든 기획 - 운하, 제염소, 다에다루스는 - 왕의 죽음으로 뜻밖의 끝을 고하였다. 제나라에 맨 처음으로 제 돈을 들여서 과학 잡지를 출판하여, 공학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자한 노력은, 그가 낸 『대수학』처럼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천체에 관한 그의 연구도 설비의 부족으로 중지되었다. 공업방면의 개선에 대한 제안도 평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주 필요한 것이었다고 그는 쓰고 있다.

 

『내가 수학방면에서 찾아낸 것은, 나라에서는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진기한 것으로 생각 되었습니다. 나는 더 이런 진기한 것을 얻고 싶습니다. 실로 일 년 내내, 문헌 방면에서 진기한 것들을! 그렇다면 세상은 그것을 즐기겠죠. 일세기 중에는, 예부터 밟아 다져진 길을 뚜벅뚜벅 걷는 사람은 남아날 만큼 있지만, 일세기 안에 이론과 이성에 선 진기한 것을 낳을 수 있는 이는 대 여섯도 안 됩니다.』

 

1719년 [31세] 3월에, 며칠 동안 광산국에 대한 반항이 헛되어, 광산국의 다른 간부와 함께 공적인 서류에 서명할 수 없게 하여서, 그는 그 굴욕을 견딜 수 없어서 4년이 지나서 그 지위가 확인되기까지,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1) 가이거 계수관 : 이온의 형성을 계수함으로써 방사성 물질의 존재를 검출하는 가스로 차있는 전기 기구, 가이거 뮐러(Geiger- Muller) 계수관이라고도 함 (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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