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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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계속되는 영혼 탐구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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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14.12.219

계속되는 영혼 탐구

 

 

스베덴보리는 1743년[55세] 7월에, 「동물계」를 일반에게 내기 위하여, 다섯 번째 외국여행을 떠났다.

 

 

그는 암스텔담에서 「동물계」를 인쇄하기 위하여 다듬고, 해부에 대한 권위 있는 이들을 찾아보았으며, 가까이 있는 레이덴 대학을 방문 하였고, 소화기관을 다룬 제 1권의 머리말을 쓰는 것으로 가을을 보냈다. 12월에 그는 헤그에 있는 인쇄하는 이에게, 그 원고를 넘겨주었다.

 

 

바야흐로 스베덴보리는 분석에 의한 연구의 끝에 이르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찾아 항해를 이어가는 데는, 이제 새 배에 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난날, 거의 10년을, 괴로움과 쓰라림에도 굽히지 않고, 영혼을 찾아서 사람 몸의 짜임새를 연구해 왔지만, 살아 있는 몸 안의 사당(祠堂)에 겨우 이르렀다는 것을 안 것뿐이었다.

 

 

그 시대에 살던 누구보다도 사람 몸의 짜임새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었고, 그 활동의 숨겨진 방법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넋(영혼)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De Anima[영혼(아니마)]에 대하여」라고 제목을 단 초벌원고에는 - 이것은 「동물계」의 제 7부로 저술되었고, 죽은 다음, 「합리적 심리학」으로 일반에게 냈지만, 그 안에는 - 스베덴보리는 넋을 경험이나 결과에서 다루지 않고, 맨 처음 원리, 곧 선재적 인 방법으로 다루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여 주고 있다.

 

 

넋은 실지로 자연의 안쪽에 옷을 걸치고 있고, 실지로 『가장 안쪽의 피』나 『정신적인 물(액체)』로 몸 안에 현존해 있다. 그러나 넋은 정신적인 본바탕이오, 물질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가 닿는 데는 타고난(先天的)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분석의 방법은 - 수많은 과학의 도움으로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 자연 같은 것을 아는데 는, 사람에게 열려진 하나뿐인 방법이긴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더 높은 힘이 흘러들지 않고서는』참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어떤 뜻에서는 「합리적 심리학」은 스베덴보리가 나아가는 목표를 완성한 것이다.

 

 

이 책에서 실지로, 그가 넋과 몸의 관계에 관한 데까지는 넋(영혼)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그는 이 관계를 본능적인 조화의 걸림(관계)으로서 인정하고, 이것을 상응(相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는 넋이 몸에 걸어오는 방법을, 낮은 능력에 부어지는 높은 능력의 흘러듦으로 인정하였다. 예를 들면, 기쁨이라는 정신적이면서, 물질이 아닌 정서()를 생각하기 바란다. 이 정동(情動)은 신경올실의 맨 처음 것인 머릿골의 피질선(皮質線) 안에 먼저 생긴다. 그것은 이 작은 기관들을 늘여 넓힌다. 그것은 신경올실 안에 흘러들어, 그 올실은 또 늘어난다. 마침내 그 정동은 얼굴에 퍼져서, 얼굴에 그 기쁨이 늘어남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되고, 기쁨을 나타낸다.

 

 

이와 달리 마음은, 머릿골을 죄어서 피를 더럽히고, 힘살을 졸아들게 한다.

 

 

넋의 본바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넋이 몸에 전해지는 양식은, 그에게는 환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그가 몸의 얼개를 연구하는 동안에, 늘 탐구한 명확한 표적이었다.

 

 

이제야 그는 넋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알았다. 그는 그것이 지각(知覺), 상상(想像), 생각(思考), 마음(意志)에 의하여 활동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머릿골의 아주 잔(미세한) 기관과 신경올실 속으로 흘러드는 것으로, 오관(五官)에 일하는 것을 보았다. 밖에 있는 감각이 영혼에게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갈피를 잡지 못한 헤메임(미망)이다. 보기감각은 눈 안에 있지 않고, 영혼 안에 있다. 영혼과 몸의 관계는 조화 그것이오, 상응이다. 밖에 있는 것이 안에 있는 것과 잘 어울리고 들어맞을 (일치할) 때, 그것들은 서로 맞아서(상응)하나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스베덴보리는 영혼 안에 있는 명확히 나누어진 두 가지 단계를 알아 차렸다.

 

 

하나는 「아니무스(Animus)」라는 낮은 마음이오, 또 하나는,「멘스(mens)」라는 높고 또 합리적인 마음이다. 아니무스는 지각이 머무는 곳이다. 기쁨, 슬픔, 성애(性愛), 부모의 사랑, 우정, 큰 욕망(야망), 자신을 낮춤(卑下), 업신여김(경멸), 명예욕심, 관대함과 아량, 탐욕, 낭비, 공포, 불쌍히 여김, 용기, 치욕, 원수 갚음, 정신이 조용하고 평안함, 성급함, 건강부주의(불섭생), 양생(養生), 절약 따위는 아나무스 에만 있는 것이다.

 

 

멘스(Mens) 또는 높은 마음은, 아니무스가 정서의 생명인 것처럼, 생각의 생명이다.

 

 

이 책에서 스베덴보리는 몸에 대한 영혼의 관계를 말하지만, 다른 한쪽, 곧 영원한 『하늘세계(天界)의 사회』와 불멸성에 대한 영혼의 관계도 말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것은 조금 밖에 얼지 못했고, 그것도 막연한 억지추측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알려는 욕구는 앞서보다 더 타올랐다.

 

 

그는 영혼이 그 몸과의 걸림(관계)에서 풀려났을 때, 그 형편이 어떻게 되는가를 몇 년 안가서 말로 밝힐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영혼은 죽은 다음에 어떠한 꼴을 할까에 대해서는 다음에 적힌 대로, 그때에는 아무런 분명한 생각을 못 가졌다.

 

 

『실제로 다음 것은, 곧 우리들은 사람의 모습을 입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모습은 다만 낮은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하늘세계에서 영혼은 새와 같은 것이다……. 영혼은 발과 다리는 없어도 된다. 그래서 힘살도 곧 살과 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혼으로 살 때, 아마 우리들은 우리들이 그렇게도 어린 아이처럼 천진스럽게 생각했던 것을 웃을 것이다.』(합리적 심리학) 521-524쪽)

 

 

스베덴보리는 「합리적 심리학」을 세상에 내지 않았다. 아마도 영혼의 참 모습 그것의 앎이 그를 피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오늘날의 심리학 목표보다 더 가까이 닿을 수 없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분석이 그를 이처럼 해부학으로 끌어들인 그 방법이 충분하지 않음을 벌써 알아차렸다. 정말로 그는 맨 꼭대기에 다다랐으며, 그 보다 더 올라가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일 이었다. 그는 안에 있는 근원으로 이끄는 것을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론이 아닌 직각(直覺)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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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탐구해 가면서, 이 훌륭한 과학자, 해부학자, 철학자는 , 영혼이 몸에 작용하는 방법을 알았다. 영혼의 깨닫기 작용은 머릿골의 피질원질(皮質原質)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해부학 사상 맨 처음으로 밝혀내기는 했지마는, 영혼 그것은, 영혼의 원질 그것은, 영혼의 참모습 그것은, 분명하지 않았다. 정신적인 물은 영혼의 매개체이며, 몸 안에 있는 영혼의 대리자요, 머릿골 피질선의 가장 깊은 골방에, 세상의 맨 처음 원 바탕 「오라」에서 생겨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영혼 그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물을 옷으로 걸치고 있는 영혼의 원바탕인 영혼의 참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스베덴보리는 그 탐구에는 분석적 방법과 종합적 방법은 쓸모가 없고, 오직 직각하는 능력만이, 알아보는(식별)힘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스베덴보리는 땅 위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꼭 같이, 사실이면서 물리적이 아니며, 물질적이 아닌 것이 있는 다른 세상의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는 않았다. 죽은 다음에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그것처럼 우주를 창조한 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에 대한 의심하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데는 그의 환경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는 고귀한 루터 교회의 감독이요, 그가 어려서 들어간 웁살라 대학에서는, 신학을 철학과 같이,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영혼의 참모습을 아는데 는 직각하는 능력만이 있어야 하는 것을 안 그는, 저 물질세계가 아닌 것과, 저 영의 세계가 얼마 안가서, 그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와 꼭 같이 몸소 보기도, 듣기도 하는 현실로서, 영혼의 참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고 상상은 물론 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그는 그 세계의 문간에 서 있다는 것을 굳게 믿은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는 유별나게 다른 꿈을 이어서 꾸었으며, 이상하게 매우 넉넉하고, 힘이 있는, 감각을 넘어선 생명이 그에게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736년 [48세]부터, 자주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이세상것이 아닌 이지(理知)가, 그가 다다른 이론의 결론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표라고 알아차렸다.(100쪽 참조). 그러나 바야흐로 이런 표적은, 더 결정적인 뜻을 가지고, 그의 생명을 이끌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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