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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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학자들 사이에서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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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 사이에서

 

『될 수 있으면 임마누엘 스베덴보리 삼촌을 찾아보세요. 하지만 삼촌이 정한 시간에 가시오. 삼촌은 언제나 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매우 소중히 하니까』라고, 1740년 [52세] 12월 5일에 *벤세리우스 감독은 스톡홀름에 있는 아들 찰스 에스바에게 편지를 보냈다.

 

*스베덴보리의 누나, 안나의 남편

 

 

실지로 스베덴보리의 때는 언제나 무언가로 막혀 있었다. 그는 광산국에서 기운을 내어 그 일에 종사했다. 그는 쇳돌(광석)을 조사하고, 일상 임무와 광산관계의 소송 사건을 처리하고, 그 나머지 시간을 신경실을 연구하는 일, 영혼의 성질을 탐구하는 일에 썼다. 그는 오란다 에서 10월 하순에 돌아왔다.

 

 

스베덴보리가 이탈리아에 가서 없는 동안에, 카르르 구스타브 텟심 백작, 마르틴, 트리발드, 안델스 훤 헤프켄, 카르르 린네, 요나스 아리스토레메르에 의하여 새롭게 과학학사원이 세워졌다. 감사관이 외국에서 돌아오자 곧 그들은 그를 회원으로 추천하고, 학사원 총재 린네에 의하여, 1740년[52세]11월 26일에 회원으로 지명되었다. 12월 10일에 스베덴보리를 한 결로(만장일치)학사원의 한사람으로 받아들였고, 학사원의 서기로 또 유능하고 정력이 넘치는 안델스 훤 헤프켄 백작에 의하여 환영을 받고, 1월에 그 자리를 얻었다. 헤프켄 백작은 텟싱 백작과 같이 스베덴보리의 가장 좋은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 12년 뒤에는 이상한 승진으로 스웨덴의 수상이 되었다. 텟싱 백작은 성격이 강하고, 훌륭한 재능을 가졌고, 잘 다듬어진 왕의 신하였고, 그 시대 최고의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햇트당에 속하였지만, 러시아와 운이 없는 싸움에 매우 언짢으면서도 동의하라는 강제요구를 받았지만, 그는 스웨덴의 역사에서 훌륭한 정치가라는 평을 받는다. 린네는 식물을 분류하는 법을 처음 시작한 것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스베덴보리가 이 학사원에 원고를 준 맨 처음 논문은, 「웁살라에 대한 자석침의 편차(偏差)」라는 제목이 붙은 것으로, 그것은 셀시우스 교수가 스베덴보리가 없는 동안 그 학사원 앞에서 발표한 논문의 대답으로 쓴 것이다.

 

 

셀시우스는 섭씨온도계를 발명한 이로써 알려진, 대학 천문학교수로서 아버지인 닐스 셀시우스의 뒤를 이었다. 그는 스베덴보리의 수학 교사였던 페엘 엘휴브스의 조카치고, 웁살라에 드디어 천체관측소가 세워진 것은 그의 힘에 의한 것이고, 거기에서 셀시우스는 기상학과 자석 기운(자기)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천체 관측소는 스베덴보리가 청년 시대에 열렬하게 구했던 것이었다. 셀시우스는 그 스스로의 관측과 계산결과를 적고 「원리론」에 있는 스베덴보리의 계산을 비판했다. 그는 스베덴보리의 계산은 이론에만 바탕해서, 8 도나 더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감사관의 가설에는 조금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 넉넉하게 밝혀졌다.』스베덴보리는 그 대답에서, 저 자신의 이론적인 계산과, 셀시우스 교수의 실제적인 관측 사이에서 틀리는 것은, 그가 내세우는 8도 13분이 아니고, 1분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반론을 하였다.

 

 

스베덴보리의 삶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그가 말하는 것에 특히 관심이 쏠리는 것은, 감추어진 일을 탐구할 때에 쓰이는 두 방법에 대해서 그가 내리는 정의 인데, 곧 그는 아 프리오리, 또는 종합적 방법과, 아 포스테리오리 또는 분석적 방법을 부르짖고 있다. 앞의 방법은 옛날 사람(고대인)에게서 쓰이고, 뒤엣것은 오늘날의 학자들에 의하여 쓰이고 있으며, 『오늘날의 학자들은 생각을 쉬게 하는데 듯을 같이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감각에만 하소연하는 실험에만 저 자신을 멈춰두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 주고 있지만, 사람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단순히 사실과 실험을 몇 세기에 걸쳐서 쌓아 올리는 것만이, 그 위에 큰 집을 세울 수 잇다는 자들하고는 뜻을 같이 하지 않는다.

 

 

그는 셀시우스 교수가 웁살라에서 행한 정확한 계산에 대하여 그 교수에게 고마운 뜻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이론은, 그것이 굳혀지려면, 실제 관측으로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다음 해로 넘어가서 많은 원고지를 메우고, 의사록 안에 남아 있다.

 

 

1741년 1월 29일 - 스베덴보리의 쉰 세 번째 생일 - 감사관은 과학 학사원에 「동물계의 얼개(구조)」한 벌을 드렸다. 그러나 교양 있는 학자들과의 사귐도, 나중에 그가, 그 영적인 사명을 안고 떠났을 때, 거의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과학 학사원과 그의 연줄은 단순한 인사차림이었다. 그렇지만 이 학사원은 그가 죽은 뒤에, 그 귀중한 원고를 받아들여서 가장 높은 존경의 마음을 다하여 이것을 간직하였다.

 

 

1743년 [55세]3월 26일에, 그는 남쪽 스톡홀름에서 정원이 있는 집을, 그 거리 회계계(會計係)에게서 구리돈(동화)6천 다레르에 사들였지만, 그리로 옮긴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나서 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해 여름, 다시금 외국에 2년 동안 살기 위해서 본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또 은돈(은화)1,200 다레르에 이르는 그의 봉급은 광산국의 다른 간부들에게 나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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