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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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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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14.12.219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

 

 

 

(A) 하나님의 사람됨(인간성)

 

 

「열어 보임(계시)에 의한 계시록 풀이(해설)」를 스베덴보리가 1764년[76세], 외국에서 돌아와서 곧 쓰기 시작하였다. 이 책은 앞서의 엄청난 「계시록 풀이(강해)」처럼 「계시록」의 풀이 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작고 또 그 알맹이도 좀 다르다. 앞서 책은 19장까지 풀이하다가 뜻하지 않게 끊어져서, 세상에 내놓지도 않았다.(181쪽 참조)

 

그 책 알맹이에 관하여 자세히는 댈 수 없지만, 다만 「계시록」11장 3절에서 7절에 걸쳐 적혀 있는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아비소스)에서 올라온 짐승과 싸우다 죽은 두 증인」에 대하여 적은, 스베덴보리의 풀이를 조금만 훑어보자.

 

 

스베덴보리는, 그 책 490번에, 「두증인」이란,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는「십계명을 따라서 삶으로써 주님과 연결되는 것이다」고 풀면서, 그 어느 것도, 지금껏 내려온 기독교회 안에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죽임당한」곧 「주님의 사람됨(인간성)」이 신령인 것을 부정하고, 사람은 다만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내세우는 용의 패거리에 의하여 내몰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용의 패거리에 의하여, 아니라고 물리침을 받은 두 본바탕, 곧 주님의 사람답기(인간적)는, 하나님의 사람답기[하나님의 사람됨(인간성)]이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십계명을 그대로 살아가는데 달려 있다는 가르침이야 말로, 주께서 영적으로 무너져 버린, 내려오던 기독교회에 이어서, 영원히 세우시는 「새 예루살렘 교회」의 「두 감람나무」,「두 촛대」, 곧 뿌리가 되는 두 가르침이다, 고 스베덴보리는 말한다. 그러면 「새 예루살렘 교회」의 본바탕이 되는 이 둘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기독교회 안팎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세 가지로 생각하는데, 그 하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지음 받은 분이라고 생각 하는 것인데, 이것은 아리우스 설로 대표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으로는, 성서의 말씀이 밝히 풀리지 않는다. 가령, 요한복음 1장에는,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는 데에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 처녀 마리아 안에 「육신이 되셨다」, 곧 「사람이 되셨다」고 적혔고,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신 하나님을 우러러 보기를 바랐던 예수의 제자 빌립에게, 예수는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한복음 14장 9-10절)고 말씀하셔서, 예수의 사람됨 속에 우주를 지으신 분이 현실로 있어서, 예수와 우주를 지으신 분은 한 몸인 것을 밝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아리우스 설은 마땅히 길 다른 것(이단)으로서, 기독교회에서 배척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예수를, 우주를 지으신 분의 그 모습(화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베리우스 설」로 불리는데, 이에 의하면, 방금 찾아본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또는 요한복음 8장 58절에 있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하는 말씀은 잘 이해되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준 예수의 모습은, 전혀 밝히 풀리지 않는다. 거기에서 예수는, 아버지가 마시라고 주는 잔 - 십자가의 죽음 - 을 할 수만 있으면, 마시지 않고 이것이 지나가게 해주실 것을 『괴로워하며』『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어서』(누가복음 22장 39-46절) 아버지 하나님께 빌고 있다. 만일 시베리우스 설이 하나뿐인 말씀의 풀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빈다고 하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 설도 교회는 길 다른 것(이단)이라고 물리쳤다.

 

 

스베덴보리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기독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통 설은, 기원 325년, 베데니아 거리에 있는 니케아에서, 콘스탄틴 대왕이 불러 모은 교회 회의에서 정한 니케아 믿음조목인데, 그에 의하면, 앞서 “주(註)”를 단 곳(139쪽 참조)에서 말한 것 같이, 우주를 짓기 전에 아버지, 아들, 성령, 이 세 하나님, 세 인격이 있고, 아들은 몸을 입어 사람이 되었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 됨(신성)과 사람됨(인간성)이 섞여지는 일이 없이 있다. 이 니케아 믿음조목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세 하나님, 세 인격은, 한 하나님과 한 인격이라고 하는 정통설의 가르침은, 미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치에 어긋났으며,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 됨과 사람됨이 섞이는 일이 없이 있다는 말(設)은, 끝내 그리스도를 겹친 인격(이중인격)으로 만들고, 또 이 가르침은 마태복음 28장 18절에 『나는 - 십자가에 못 박혀 손바닥에 못자욱을 남긴 채고, 또 살과 뼈를 지닌 채로 다시 살아난 이 나는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하신 예수의 말씀에, 맞바로 맞서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치에 어긋난 것으로 가득한 니케아 믿음조목을, 기독교회는 입술로는 받아들이지만, 마음으로는 아니 여기고, 누구하나 또렷한 인식을 가지고, 사람 예수 그분을 예배의 대상으로 하지 않고, 다만 아버지 하나님에게만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릴뿐, 실지로는 예수를 지워 버리고 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예수의 인격을 어떻게 풀고 있는가.

 

요한복음 1장 1절과 2 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적혀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성언)』은 하나님이 지혜와 지성(知性)을 뜻하고, 『말씀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고 푼다. 우주창조의 처음에 있은 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뗄 수 없게 걸려 있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지혜」로서 있으며, 더구나 사랑과 지혜를 그 본바탕으로 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의 꼴을 갖고서 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저승에서 알게 된 진리이다.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들여서, 영원히 사는 천사의 존재를 바라서, 곧 그 존재를 사랑하고, 그 사랑에 움직여서, 그 지혜로서 영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만드셨다.

 

 

『지혜는 사랑에 움직여서 쓰임(用) - 쓸모가 있는 것 - 을 만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우주창조에서 가르치는 원줄기의 하나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통한다. 우리들도 어떤 쓸모가 있는 것 - 쓰임(用) - 을 바랄 때, 곧 사랑할 때, 모자라지만 지혜를 써서, 그 무엇을 만들어 내며, 지혜는 사랑과 뗄 수 없게 걸려 있다.

 

또 우리들은 지혜나 사랑을 말할 때에는, 그것은 꼴이 없는 추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진실한 꼴을 가진 영(정신)의 원 바탕이다, 고 스베덴보리는 말한다. 영의 원 바탕(원질)이 어떤 것인지는, 우리들이 이 자연세계를 떠나서 영계로 들어가면, 그때에 실지로 눈으로 보기도 하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있으리라.

 

 

우주창조의 처음에, 사랑을 본바탕으로 하고, 지혜를 사랑의 꼴로 하여, 곧 사람으로서 계시는 하나님은, 맨 처음의 자기한정(自己限定)으로서, 저 자신에게서 영계의 해가 나오고, 그 영계의 해에서 먼저 하늘공기(天的大氣)를, 하늘공기에서 영의 공기를, 영의 공기에서 영과 자연의 공기가 나오고, 그와 같은 때에, 자연의 원 바탕에서, 자연계의 해가 창조되고, 그 자연계의 해에서 차례로 오-라, 에-텔, 옥기가 나오고, 공기에서 광물, 흙을 만들고, 그리하여 사람을 이 큰 우주의 모든 것을 받아 넣을 수 있는 꼴로서 만드신 것이다.

 

 

이 창조의 과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에서 자세히 논하고 있다. 우주는 『사랑을 본바탕으로 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성이 낳은 것이라』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우주창조의 철학적, 종교적 사상의 뿌리기둥이다.

 

 

이 사랑을 본바탕으로 하고 지혜의 꼴, 곧 사람으로서 계시는 하나님은, 그 지혜를 그 사랑자체에서 갈라내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알맹이[정(精)]에서 나와, 처녀 마리아를 어머니 태로 하여, 마리아에게서 사람됨을 취한 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이 몸이 되었다』는 뜻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 그것에서부터 갈라내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알맹이에서 나온 하나님의 지혜가, 처녀 마리아 안에서 사람됨을 가졌다』는 깊고도 먼 비밀은, 스베덴보리가 『계시에 의한 계시록 풀이』가 나온 지 두 해가 지나서, 실지 이름으로 지은 「혼인사랑」220번에 적은, 사람이 태어나는 비밀을 보면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거기에 이렇게 말한다. 『남성의 영혼은 이지적인 것같이 그것을 진리인데, 이지적인 것은 그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이(몸으로)내려오는 동안, 진리도 내려온다. 곧 사람과모든 동물에게 가장 깊숙한 것이고, 그 본바탕으로는 영직인 영혼은, 그 자신을 펴려고 하는 안쪽에 있는 충동으로부터 (그 충동에 이어서) 내려와, 그 자신을 낳기 바라서, 그 일을 행하는 동안에 영혼 전체는, 그 자신을 꼴로 만들어, 그 자신에게 덮어 씌워서 알맹이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몇 천 번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은 펴짐을 갖지 않고, 가득함(충만)[안에서부터 가득해지는 것]을 지닌 영의 원바탕이며, 거기에서는 한 부분도 떼어 낼 수가 없고, 그것은 그 모두를 조금도 잃지 않고 낳기 위함이다. 영혼은 알맹이는 가장 작은 기관 속에도, 몸인 그 가장 큰 받아 넣는 기관 안에도 완전하게 있는 것같이 완전하게 있는 것은, 여기로부터 일어난다. 그래서 영혼의 진리가, 알맹이가 생긴 본바탕이기 때문에, 사내는 지혜의 여러 진리를 넓히고자 하는 그 사랑에 따라서, 힘(능력)을 갖는 일이 생기고 있다. 그것은 또 쓰임을 다하려는 사내의 사랑에도 따른다는 것은, T임은 진리를 낳는 착한(선)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힘을 갖지만, 게으른 자는 힘을 갖지 못하는 것도 세상에 있는 몇몇에게는 알려져 있다.』

 

 

여기에 가르치고 있는 것은, 남자의 영혼은 지적인 것 또는 진리이며, 그것은 그 지성의 여러 진리를 남에게 전하려고 하는 또는 그 지성의 여러 진리를 써서, 무슨 선을 다하려고 하는 안쪽에 있는 충동에 따라서 몸으로 내려오지만, 그 때 영혼으로부터 그 영혼이 지닌 가득함에서 많은 완전한 영혼이 갈라져 번져서, 그 번진 많은 영혼이 몸 안에서 덮어 씌워, 많은 알맹이 또는 씨[종(種)]로 된다는 것이고, 이 아버지의 지성에서 갈려낸 알맹이에 있는 아버지의 지성 그것이 어머니의 배 안에서, 어머니에게서 몸을 입는다.

 

 

여기에서 뚜렷한 것처럼 어머니의 배 안에서, 어머니에게서 사람을 - 정신과 몸 - 입는 것은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어느 것이나 아버지의 지성이요, 하나님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지혜요, 사람의 경우엔 사람의 지혜인데, 오직 하나님의 경우에는, 처녀 마리아 속에 마리아에게서 사람됨을 취한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에서 갈라내지 않은 채로 나오지만, 사람의 경우는, 어머니 배안에서 몸을 입는 아버지의 지혜는, 아버지의 지혜에서 완전히 갈라내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떨어지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알맹이 속에서 나온 하나님의 지혜가 - 이 하나님의 지혜도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하나님이 지혜가 - 처녀 마리아 속에서, 스스로에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지혜를 옷으로 하여 마리아의 사람됨을 가졌는데, 이 사람됨은, 태어나는 법에 따라, 어머니 배 안에 열 달 동안 머물다가, 달이차서 태어나, 어려서는 어린아이의 지혜, 소년 때는 소년의 지혜, 청년 때엔 청년의 지혜를 얻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 사람됨 속에 얻은 지혜를 면(面brain)으로 하여, 거기에 하나님의 지성과 하나님의 지혜 스스로를 머물게 하며 또는 받게 하여, 그 사람됨 속에 머물고 또는 받은 하나님이 지혜를 똑같이 그 사람됨 속에서 많은 시달림(시련)을 거쳐서, 하나님의 지혜를 본바탕으로 하는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사랑에 연결되고 합치어 하나가 되었다.

 

 

처녀마리아 에게 서 얻은 사람됨 속에, 예수는 자연계에서 배운 진리를 면(面brain)으로 하여, 하나님의 지성과 하나님의 지혜를 받고 또는 머물게 하여, 그 받고 또는 머무는 하나님의 지성과 하나님의 지혜를 똑같이 그 사람됨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본바탕인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에 연결, 합쳐서 하나가 되게 하는 데는, 처녀 마리아에게서 오는 사람 속에 머무는 내림악(유전악)을 물리치는 데 있으며, 그것을 위하여,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는 가장 큰 시달림을 이김으로써, 처녀 마리아에게서 온 사람됨에 머문 내림악 - 자기와 세상을 구하는 내림악 - 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사랑에 맺고 합쳐 하나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예수의 사람됨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갈라질 수 없음이 굳혀졌으며, 그 사람됨을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사람됨(인간성)』이라고 부른다.

 

 

그런고로, 아버지 하나님께 하소연은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 되신 예수를, 현실로는 업신여기는 기독교회에 이어서 영원히 세워지는 「새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람 예수 안에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고, 사람은 하나님이 되신 분』곧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되며, 그것이 또 마태복음 28장 18절에 있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는 참되고 영원한 뜻이 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한다. 그럼 이것으로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아비소스)에서 올라온 짐승과 싸우다 죽은 두 증인』가운데서 한 증인을 아주 간략하게 풀었다. 다른 한 증인의 뜻으로 향하자.

 

 

(B) 하늘나라에 가는 길

 

 

스베덴보리가 살던 때는 말할 것 없고, 오늘날도 기독교회에서 풀이하고 있는, 사람을, 죽은 후에 하늘나라로 이끌어 들이는 믿음은 「창조이전에 계신, 세 하나님, 세 인격 중에, 중간의 하나님, 중간의 인격이, 처녀 마리아 속에 사람이 되어서,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리어서, 인류의 죄에 대한 첫 번째 하나님 - 아버지 하나님 - 의 형벌을 없애고, 또는 첫 번째 하나님인 아버지 하나님의 노여움을 달랬다. 첫 번째 하나님은 두 번째 하나님인 아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서 겪는 괴로움을 보아서, 이 두 번째 하나님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넘겨씌워서(전가 시켜서), 처음부터 죄로 더럽힌 자를 의로운 자, 거룩한 자라고 선언하고, 이에 하늘 문을 열어서 하늘나라에 들게 한다.」는 것이다. 무릇 조금이라도 이성을 지닌 자라면,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가 풀어 가르친 믿음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아마 그 이치에 맞지 않음과 잔인함에 소름이 끼치리라.

 

 

곧 창조이전에, 아버지 하나님, 하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셔서, 더구나 이 세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른바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어떠한 하나님인가! 그것은 실지로는 세 하나님이 아닌가! 더구나 그 세 하나님 가운데서 둘째 자리에 있는 하나님이 땅위에 내려와서, 마리아의 배안에 머물었다고 하는 가르침은, 사람이 지닌 이성에 쌈걸기(도전), 또는 바보로 놀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몹시 아프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사람을 지옥에 빠지게 하라는 선언을 걷어치우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크게 욕되게 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나님은 사랑 그것이어서, 사랑에 노여움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더구나 그런 괴짜 같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의 과거나 앞날의 삶이 아무리 많은 죄악으로 더럽혀질지라도, 아들 하나님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넘겨씌워서, 거룩한 자라고 해서 죽은 뒤에 하늘 문이 열린다는 가르침은, 「산에서 내리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밖에 다른 것을 걷어차고, 뼈대를 발라내는 것보다 더하며, 그리스도를 욕되게 함이 아니랴.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간음하지 말아라」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표준 새번역 마태복음 6장 27-29절)하고 말씀 하시며, 『나더라.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표준 새번역 마태복음 7장 21절)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 뼈대만 남은 기독교회는, 그 실없는 소리의 터무니(근거)로, 로마서 3장 28절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고 하는, 바울이 쓴 편지에 있는 말을 든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갈라디아서 5:6). 그밖에 뚜렷한 것같이 『그 「율법의 행위」는 십계명의 행위가 아니고, 유대사람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뜻하고, 또 믿음은, 아버지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 아닌바, 하물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죄에 대한 노여움을 달랜 것을 믿는 ale음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바로 그 분을 믿는 믿음이다』(「참기독교」337번).

 

 

그런고로 도깨비가 날뛰는 기독교회 다음에 세워지는 「새 예루살렘 교회」가 맞이하는 둘째 증인은, 기독교회에 있어서는 죽임을 당한 곧 배척을 받은, 「십계명을 따라서 오직 그것만으로 주님과 연결된다.」는 가르침이다. 하늘나라 문을 여는 길은, 「그 속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사람이 하나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십계명을 실행하는 것에 의하여, 영(정신)으로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것」말고, 절대로 하나가 없다.

 

스베덴보리가 『열어 보임에 의한 계시록 풀이』에 밝히고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이다.

 

그는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에서 올라온 짐승과 싸우다 죽은 그 주검이 사흘 반 동안, 큰 도시의 넓은 거리에 내버리게 되는 두 증인』을 적은 계시록 11장을 풀이 하면서, 그 자신이 겪은 일을 「영계일기」에 간단하게 또 「계시에 의한 계시록 풀이」(53번)에 써 남겼는데, 그것을 따온다.

 

 

『나는 일찍이, 갑자기 금방 죽을 것 같은 병에 걸렸다. 나는 머리 전체가 눌렸다. 「소돔과 이집트」로 불리는 저 예루살렘에서, 해로운 연기가 올라왔다. 나는 심한 고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을 미리 짐작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잠자리에 사흘 반을 누워있었다. 내 영은 그처럼 되었고, 거기에 따라서 내 몸도 그렇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내 둘레에서 몇 사람의 소리가 「보라,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와, 사람 그리스도만을 말한 사람이 우리 도시의 넓은 거리에 죽어 있어」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교직자 몇 사람에게, 나를 묻어도 좋은 지를 물어 보았다. 「아니, 구경거리가 되게 그를 그냥 둬.」하며, 왔다 갔다 하면서 비웃었다. 이런 모든 일이, 내가 계시록 11장을 설명할 때 실지로 내게 일어났다. 그 때, 비웃는 자들의 매서운 말이 들리는 중에 특히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렸다. 「믿음이 없이 어떻게 회개할 수 있나, 사람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나님으로 우러러 받들 수가 있나,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 아무 공로가 없이, 값없는 은총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믿음 말고 무엇이 필요한가. 곧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서 율법의 저주를 없애서, 그 공로를 우리들에게 떠넘겨, 이리하여 우리들을 그의 눈앞에 의롭다 하고, 그 심부름꾼인 사제에 의하여 우리들을 우리들의 죄에서 사면하고, 그리하여 성령을 우리들에게 주어서, 우리들 속에 모든 선을 행하게 한다는 믿음을 빼고, 무엇이 또 있어야 하나, 이러한 일은 성서를 따른 것이며 또 이성도 따른 것이 아니냐.」옆에 서 있는 무리들은 이 일에 손뼉을 쳤다. 나는 이런 것을 들었지만, 죽을 지역이었기 때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나, 내 영은 도로 찾게 하고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들의 죄는 용서받고, 당신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망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 받으려면 회개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또 주님을 믿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말하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까.」그러나 저들은 대답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아들이 갚아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아버지는 그것을 우리들에게 떠 넘겨서, 그것을 믿는 우리들을 옳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하여 우리들은 은총의 성령에 이끌리고 있는데, 어떤 죄가 우리들에게 있을 수 있느냐. 죽음은 우리들에게 어떠한 힘을 갖느냐, 죄와 회개의 설교자여, 너는 이 복음을 아느냐」그러나 그때에, 하늘나라에서 한 소리가 들리어 말하기를,「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냐, 끝이 왔다. 너희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옭게 되고, 너희들 스스로의 눈에 허물은 없고, 만족하고 있는 너희들 악마에게 끝은 왔다.」갑자기 그 도시 한복판에, 한 깊은 못이 열리어 멀고 넓게 퍼져서, 집은 한 데 겹쳐 넘어져 삼키 우고 말았다. 곧 물이 그 넓은 소용돌이에서 끓어올라, 비로소 거친 땅에 넘쳐흘렀다.

 

 

그들이 이렇게 가라앉아서 물에 잠긴 것 같이 보였을 때, 나는 그 깊은 못에 있는 그들의 운명이 알고 싶었다. 그러자 내게 하늘나라에서 「네가 보고 또 듣게 할 것이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그들이 그 속에 빠진 것처럼 보였던 물은 내 눈에서 사라졌다. 왜냐하면, 영계의 물은 상응이고, 그것으로 오류 속에 있는 아들 둘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때, 그들은 돌이 산처럼 여기저기 쌓아 올린 모래땅에서 내게 나타나, 그 사이를 달리면서 저들이 큰 도시에서 내쫓긴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외쳤다. 「어째서 이 모두가 우리에게 일어났나. 우리들은, 우리 믿음으로 맑고 순결하고, 또 거룩하게 될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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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를, 마음을 다해서 섬긴 가정부가, 이따금씩 악령이 주인마님을 괴롭히고, 잠을 설치게 하게 허락한 모양을, 롭삼에게 깊은 감동을 담고서 쓸 때에, 아마도 앞서와 같을 일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여자는 주인마님께서 가끔 애처롭게 울며 큰 소리로 주님에게, 제가 시달림을 받을 때,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고 썼다. 모두 끝이 나서 곁에서 섬기던 이들이, 어째서 그리하셨는가를 여쭈니까, 주인께서는 자주 말씀하시기를 『고마워라, 이제 끝났습니다. 내 일로 하여 마음을 상하면 안 됩니다. 무엇이 내게 일어나도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해 낼 수 없는 시달림은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한번 이러한 일이 있고서, 주인마님은 자리에 눕게 되어, 여러 낮과 밤을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지 않아서, 우리들은 매우 걱정 했습니다, 고 가정부 마리아는 말하였다. 모두는 주인마님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여, 문을 억지로 열든가, 친구 분들을 부를까도 생각하다가, 드디어 남편이 창가에 가서 보니, 주인마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주인마님이 주무시다가 몸을 뒤척였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주인마님은 종을 울렸기 때문에, 우리들은 곁에 가서 모두가 걱정한 일을 아뢰었더니, 주인마님은 유쾌한 얼굴로, 이젠 모두 좋아졌다. 아무 걱정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더 묻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가 쓴 책에, 영계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을 적고 있는데, 이 기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관심을 끈다. 그는 「풀이」한 부를 파리에 머물러 있는 스웨덴 대사에게 드렸을 때 써 보내기를 『나는 영계에서 알게 된 아주 다른 일들을 책에 끼워 넣었습니다. 그것들은 본문에서 별 표로써 떼어 내어서, 장마다 풀이 뒤에 적었습니다. 거기에는 이상한 일이 더러 적혀 있기 때문에, 아마 읽는 이는 흥미를 돋워서 한번은 읽겠지요.』(암스테르담,1766년[78세] 5월).

그의 동무인 폰 헤프켄 백작은, 처음엔 그 이상한 이야기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번은, 그에게 어째서 당신은 그런 이상한 일을 써서 세상에 알렸는가, 그것은 당신의 가르침이 비상한 비웃음을 받게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런 일에 쓰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대단히 건전한 것일 터인데, 당신은 그것들을 자기에게만 숨기고, 세상에 알리지 않는 쪽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올바로 알지를 못합니다. 「어째서 다 늙어 빠진 내가 있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서, 제 스스로가 웃음거리가 되어야 합니까.」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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