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모양과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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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화해와 중재에 대하여.

  • 관리자 (ecclesias)
  • 2018-01-01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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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화해와 중재에 대하여.

 

 

신령존재를 형성하는 데는 세 인격들이 있다고, 그리고 이들이 합쳐져서 한 분 하나님이라고 불리운다는 것을 믿는 자들은, 말씀의 문자적인 뜻으로부터 주님께서는 그분의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는 것과, 그리고 사람이, 마치 사람과 같이 하듯이, 아버지 그 분과 말씀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 아버지에게 사람들의 탄원들이나, 애원들을 가지고 온다는 것과, 그리고 그 분의 목적을 위해서 간청한다는 것 이외의 화해나 중재에 속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담당하셨고,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셨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자비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이 모든 소박한 사람이 성언의 문자적인 뜻에서 취하는 중재와 화해의 개념이다.

 

 

그러나 주지해야 할 사실은, 말씀의 문자적인 뜻은 그것들이 내면적인 진리들에 소개되기 위해서는 소박한 사람들의 이해력에 일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박한 사람은 이 땅의 왕국에 속한 것 이외의 천적인 왕국의 어떤 다른 개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또한 이 땅의 왕에 속한 것 이외의 아버지에 속한 어떤 다른 개념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왕국의 상속자로서의 임금의 아들에 속한 것 이외의 주님에 관해서 다른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소박한 사람이 이런 부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님나라에 관한 주님의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일 처음에, 유대민족의 나머지 사람들과 꼭 같이, 메시야로서의 주님은 이 땅의 위대한 왕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을 온 지구상의 민족들이나 백성들에 비하여 가장 높은 영광이 지위에 올려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 그 분에게서 그의 왕국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천계에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 때 그들은 천계에 있는 주님의 왕국은 이 땅에 있는 왕국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 이외에 달리 생각 할 수 없었다. 그럼므로 야고보과 요한이 그분의 왕국에서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그리고 그 나라에서 위대한 자가 되기를 원했던 나머지 사도들이 분노 심을 가졌고, 그들 중에서 누가 위대하게 될 것이냐를 서로 다투었다. 이런 생각이 그들에게 굳게 밀착 되어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개념이 뿌리 뽑힐 수 없기 때문에, 사실 주님께서는 사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막10:37,41.눅22:24,30. 마19:28). 그러나 그들은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신 “열두 보좌들”이나 “열두 지파들” 그리고“ 심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이상의 모든 것에서 볼 때,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주님의 화해와 중재에 관해서 그 개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의 근원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겠다. 그러나 말씀에 속한 내면적인 것들을 잘 아는 사람은 주님의 화해나 중재에 관해서 전적으로 다른 의견이나 생각을 가진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이 땅의 왕가의 아들로 중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분 자신과 함께하는 우주의 주님으로서, 그리고 그분의 하나님으로서 중재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그 분은 둘이 아니고 한 분 존재이시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셨다(요한14:8-11). 주님께서는 “화해자”와 “중재자”라고 불리웠다. 그 이유는 “아들”은 신령진리을 뜻하고, “아버지”는 신령선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해는 신령진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이유는 그것에 의하여 접근이나 출입이 신령선에게 허락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령선은 그것은 태양의 불과 같아서, 근접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신령진리는, 거기에서 온 빛과 같고,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시각에, 그리고 믿음에 속한 것에, 통로나 근접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해나 중재가 무엇인지 밝히 알 수 있겠다. 여기에 근거하여 더 자세하게 언급 할 수 있는 것은, 신령선은 자체이시고, 천계의 태양 자체이신 주님께서 “ 아버지와의 화해자이시고 중재자이시다”라고 불리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리고 충분히 영화 되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신령진리이셨다. 그러므로 그 때 거기에는 화해가 있었고, 그리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중재하셨다. 다시 말하면 신령선 자체와 중재하셨다(요한14:16,17. 17:9,15,17). 그러나 주님께서 인성의 측면에서 영화하신 뒤에는, 주님께서는 “화해자와 중재자”라고 불리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분께서는 그 분 자신에게 신령사람의 개념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더욱이 이런 부류의 개념에 의한 것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신령존재에 관해서 생각 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부류의 개념에 의한 것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가 사랑을 통해서 신령존재와 결합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어누 누구가 신령사람으 개념이 없이 신령존재 차체를 생각한다면, 그는 막연하고 예매하게 생각 할 것이고, 그리고 막연하고 예매한 개념은 결코 개념이 될 수 없다. 또한 사랑은 없는 가시적인 우주로부터 또한 불영명한 목적으로 신령존재에 속한 개념을 상상하고, 착상 할 것이다. 그러한 개념은 자연 숭배적인 개념과 결합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나 개념은 자연에 빠져 들 것이다. 따라서 종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개념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명확한 것은 믿음을 통한 신령존재와의 어떤 결합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사랑을 통한 결합,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결합은 목적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성취된 결합은 목적에 속한 성질과 일치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령인간의 측면에서 “화해자.”중재자“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셨고, 중재하셨다. 신령존재 자체가 어떤 개념에 의하여 파악 될 수 없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서 명확하다. 요한 복음 말씀이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 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요한1:18)

 

아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신다. 너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은 일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일도 없다. (요한5: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에 관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육신으로부터 생각하는 자는 모두가 그분에 관하여 애매하게 생각하고, 불분명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의 명확한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자기 자신이나 육신으로부터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으로부터 그분에 관해서 생각하는 자들은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인간의 형체 하에서 신령존재에 속한 개념을 드러낸다. 천계에 있는 천사들은 그와 같이 생각하고, 그리고 지혜로운 고대 사람들은 신령 존재 자체가 나타났을 때, 역시 그 분에 대하여 신령한 사람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천계를 통과한 신령통과가 신령사람이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이 세상의 총명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그리고 천계의 총명이 어떤 종류이 성질인지,밝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총명은 자기 자신들에게부터, 인간의 개념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마음과 신령존재 사이에는 결코 화해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짙은 흑암만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하여 천계의 총명은 인간안에 존재하는 신령존재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주님은 화해이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마음 안에는 빛이 있다. 8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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