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모양과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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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속한 총명과 의지가 뜻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 관리자 (ecclesias)
  • 2017-12-30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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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속한 총명과 의지가 뜻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교회에 속한 총명은 믿음에 속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인애에 속한 선이 무엇인지를 성경 말씀에서 지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성경 말씀의 문자적인 뜻은 사람이 신봉하는 교의가 어떤 것인지를 그 뜻, 즉 문자적인 뜻에서, 확증하는 그런 성질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말씀의 문자적인 뜻에 속한 모든 것들은 진리들을 수용하는 일반적인 수용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수용 그릇들의 성질은 그것들이 진리들을 영접 수용하기 전 까지는 투명체를 통과 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개별적인 것들이나 단일적인 것들을 적합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영접 수용하기 위하여, 사람이 제일 먼저 반드시 배워서, 터득하여야 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일반적인 뜻이, 사람이 신봉하는 교의가 무엇인지를 이 뜻에서 확증하는 그런 성질이다는 것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단 사설에서 그리고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에서 아주 명확하다.

 

그 이단사설의 개별적인 것들은 말씀의 문자적인 뜻에서 비롯된 그것의 열렬한 지지자들에 의하여 확증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확증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참된 것이다고 전적으로 믿는다.

 

 

 

그리고 그 뒤에 만약에, 그들이 천계로 부터 참된 진리를 듣게 된다면, 그들은 그것의 일부분까지도 영접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교회에 속한 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교회에 속한 총명은, 사람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리고 특히 믿어여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의 다른 장절들과 비교 할 때, 사람이 지각하는 것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총명은 주님에 의하여 조요된 사람에게서, 그리고 기독교계에서 조요된 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조요는 자신의 명성이나 광영이 목적이 아니고, 다만 삶과 선용을 목적해서 진리를 알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이 조요 자체는 사람 안에 있는 총명적인 것에 의하여 영접, 수용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조요된 총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총명에 속한 것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은 성경 말씀에서 이런 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고, 그러나 조요된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성경말씀에서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더 밝히 주지하여야 할 것은 중생한 사람들은 조요 될 수 있는 총명적인 것들을 주님으로 부터 받는 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총명에 입류하고, 그것을 조요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비롯된 천계의 빛이다.

왜냐하면 총명은 그것의 빛과, 그것의 시각을, 결과적으로 다른 근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그것의 지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총명이라고 호칭되는 이 총명은 단순하게 기억지에서 비롯된 총명에 비하여 보다 더 내면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지 들이나 철학에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씀의 영적인 뜻으로, 성경말씀의 지시로 말미암아, 한 사물이 그러하다는 것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교회에 속한 총명 안에 있는 자들은 성경말씀은 어디에서나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이 교회의 본질이요, 근본이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인애에서 분리된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는 것, 믿음은 주님 사랑에 속한 선이나, 이웃을 향한 사랑에 결합하는 것을 제외하면 영생을 위하여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선들이나 믿음은, 그것들이 영적인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결합햐여야만 한다는 것 등등을 가리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지각 할 수 있다.

 

 

 

이것이 참된 진리이다는 것은 조요된 총명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는 명확하게 지각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다.

 

 

수 많은 것들에 의하여, 자기 자신들이 교회에 속한 교의들이나 가르침들은 확증하는 일에 숙련되고, 유능하며, 심지어 그것이 사실이다고, 설득하는 일에 유능한 자들은 교회에 속한 것들 안에 있는 총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고, 그리고 수 많은 이단 사설들을 능수능란 하게 논증하는 유능한 자들도, 그 총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을 총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것은 총명에 속한 것이 아니고, 감관적인 것들 안에 있는 영리함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은 가끔 가장 사악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고, 그리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들이나, 오직 거짓들만을 신봉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행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확증하고, 그리고 소박한 사람을 요령 있게 설득하는 일 이상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보다 더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총명은 어떤 교의가 참된 것이다.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다고 확증되기 전에, 밝히 지각하고, 직시한다.

이것이 바로 "에브라임"이 표징하는 총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므낫세"가 표징하는 교회에 속한 선을, 믿음에 속한 진리들에 의하여 주님으로 부터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입된 인애에 속한 선이다. 왜냐하면 인애에 속한 선과 결합하는 이런 것들은, 총명에 입류하고, 그것을 밝게 조요하는 것들이고,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형성하는 총명이나 의지를 이루기 때문이다.

 

총명과 의지 양자가 내적인 것에서 출생된다는 것은 증명된 내용에서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하여, 조요가 존재하는 선의 애정이나 진리에 대한 애정은 내적인 것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다른 근원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내적인 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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