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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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맺는 말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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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말

 

 

스베덴보리가 남긴 몸은 프린시스 너른 마당에 있는 스웨덴 울리카 에레오노라 교회의 간부인 부룩할드 씨의 집에, 정식 옷차림을 한 채로 놓아졌다.

 

장례식은 1772년[84세] 4월 5일, 일요일에 행하였고, 훼레리우스 목사 집전으로 진행되었다. 이 일은, 그가 스웨덴으로 돌아기기에 앞서 행한 마지막 일이었다. 스베덴보리의 몸은 세 개의 관 속에 눕혀지고 - 그 중의 관 하나는 납으로 만들었다 - 제단 밑의 납골당 속에 내리는 동안, 성가대는 성가를 불렀다. 회당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장례식을 마친 후, 스웨덴의 버릇(습관)대로, 라드크릿흐 큰 거리에 있는 부룩할드 씨의 집에서 잔치가 베풀어졌다. 마지막(임종)을 지켜본 두 의사 함페와 메스이타, 스웨덴 공사관 관리, 카르르 린드그렌, 또 의심할 것 없이 크리스토파 스프링겔 영사, 여관주인 에릭 베르히스트렘이 스웨덴 목사 훼레리우스와 아론 마테슈스와 함께 거기에 참석 하였다.

 

덧머리(가발) 만드는 일을 하는 샤스미스도 또한 그 자리에 있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자리에서는 그 남작이 본 이상한 곡두(환상)에 대한 이야기가 대단한 활기를 띄었다고 보고 하였다. 아무나 그 곡두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메스이타 박사와 교직자의 한 사람 - 틀림없이 마테슈스 - 사이에, 죽은 이와 주고받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의논이 벌어졌다. 손님들은 둘로 나뉘어져, 한편은, 그들이 방금 그를 매장한 것을 본 하나님을 본 자(견신자)를 지지하고, 다른 한 편은 부정하였다. 그 무리는 사실, 스베덴보리 남작에 대하여 품고 있는 여러 생각의 줄인그림(축도)이었다. 많은 사람에게는, 『새 예루살렘의 신사』로 불린 이 남작은, 자비와 사랑이 많은 온화한 환시자(幻視者)였다. 적은 사람에게는, 기성교회의 무서운 위험인물이었다. 그들은 맘을 놓는 한숨을 쉬며, 이 나이 많은 학자를 묻으면서, 그가 쓴 특별한 책들도 모두 저절로 없어져 버리는 쓰라림을 겪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 생각은 메테슈스가 품고 있는 것이었다.

 

메스이타 박사는, 스베덴보리를 지금껏 없었던 아주 놀라운 사람, 그리스도의 특별한 심부름꾼,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의 선구자, 한없는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계시가 그 손에 맡겨진 사람이라고 인정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베덴보리가 참으로 죽은 이의 영과 주고받고, 마지막 심판을 보고, 땅위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하나님의 진리의 성서를 그가 쓴 책 가운데 적고서 떠났다, 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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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서는 모든 신문이 스베덴보리의 죽음을 알리고, 과학 학사원은 세상을 달리한 그 학사원을 위하여 조문말씀(조사)을 적으라고 광산국 참여인 사무엘 산텔스에게 요구했다. 산텔스의 조문말씀은 1772년 10월 7일에 귀족원에 있는 썩 넓은 방에서 발표 되었다. 그것은 과학자 이면서 견신자 이기도 하였던 사람에게 늘 품고 있던 깊은 따뜻한 사랑과 높은 존경의 뜻을 나타내었고, 또 그의 사사로운 생활에 대한 정보에 관하여 많은 것을 이바지 아고 있다.

 

몇 해가 지나서, 새 운동의 잘난 지도자 몇 사람이, 스베덴보리의 고국에서 쏟아져 나왔다. 스베덴보리의 「후기에 지은 책」에 대한 최고의 권위는, 아마도 수상인 안델스 폰 헤프켄 백작이리라.

 

그는 스베덴보리의 값매김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내 생각으로는, 지금은 가고 없는 벗은, 의심할 것도 없이 스웨덴 나라에서 가장 큰 학자이며, 해부학을 연구하는 데서 비롯하여 영적인 울안으로 천천히 이어진 논리의 단계를 거쳐 이끌어 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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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가르침(교의)을 바탕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운동이 여러 나라에서 어떻게 모습을 달리 하였는가 하는 것은 주목할 만할 것이다. 영국에서는, 교회조직이 문제, 곧 나라에 있는 교회에서 분열하여야 하느냐, 아니면 분열하지 않아야 하느냐, 하는데 에 말의 초점이 모아졌다.

 

앞서의 생각은, 런던의 로버트 힌드마슈 목사의 지지를 받고, 뒤의 생각은 맨체스터의 죤 크로즈 목사의 지지를 받았다.

 

스웨덴에서는, 일찍부터 앞에 나타난 말의 초점은, 교회 조직문제가 아니고,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곧 스베덴보리가 받은 영감의 성질은 어떠한 것이었고, 또 그 열어 보여주신 가르침은 어떻게 인정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카르르 후레데릭 놀덴쉘드는, 스웨덴과 다른 나라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런 질문을 내었다. 1782년[죽은 지 10년], 베를린에 있는 토메 후작에게서 회답이 왔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교의)은 스베덴보리의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그것이 그 한 사람의 것이요, 주님의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쳤겠죠.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이지, 스베덴보리의 제자는 아닙니다.』

 

베이엘 박사는, 그에 대한 생각을 묻는 이들에게, 스베덴보리가 가르치는 『속뜻』은 바로 말씀 그것이요, 말씀의 거룩함이다, 고 대답하면서 『이 속뜻은 마치 말씀의 글자가 사도들에게 말씀된 것처럼, 하늘나라에서 감사관에게 보여주신 것이어서, 그것은 곧바로 하늘나라와의 주고받음을 낳습니다.』

 

스웨덴에 있는 적은수의 믿는 이들 중에서, 가장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 정통한 이로 인정을 받는 이들 중의 한 사람은 크리스챤 요한센 이었는데, 그에게도 역시 『교회에서 의견의 대립을 낳은』이 물음이 보내졌다. 그는 대답했다. 『누구라도 이 새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간다면, 그 좋아하는 대로, 곧 주님의 신령한 말씀으로, 또는 주님에게서 나온 가르침이라고 생각해도 좋겠죠.』

 

 

이러한 논의에서 당연히 스베덴보리가 남기고 간 원고의 문제가 일어났다.

『만일, 이것들이 하나님의 계시라면, 스베덴보리가 쓴 모든 것을 자손들을 위하여 보존해야만 하였다.』 카르르 후레데릭 놀덴쉘드와 그 형제는 이 책임을 느끼고, 힘껏 보존하는 일을 하였다. 후레데릭 놀덴쉘드는 먼저 과학학사원에 주의를 돌렸다. 스베덴보리의 문서가 들어 있는 상자가 영국에서 이르렀을 때에, 스베덴보리의 재산을 상속 받을 사람들 사이에서 감독 두 사람이 그 문서를 불 속에 쳐 넣으려 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마음을 써 주셨다.』그 감독의 한 사람은 틀림없는 훼레니우스 이었는데, 그가 바란 일은, 가족이 그 원고를 왕립 과학 학사원에 드리기로 정하였기 때문에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베덴보리의 일기에서, 그가 처음시기에 꾼 꿈을 적은 몇 쪽을 주의하여 없애버리고 말았다. 놀덴쉘드는 자기 돈으로 아직 책으로 꾸며지지 않은 원고를 책 몇 권으로 책꾸밈할수 있는 허가를 학사원에서 얻었다.

 

학사원에 남겨진 원고 중에는 「영계일기」, 「하늘나라의 비밀」의 맨 처음 초벌원고, 아직 책으로 나오지 않은 「계시록 풀이」전부의 두 초벌 원고가 있었다.

 

 

놀덴쉘드는 아직 책으로 나오지 않은 원문에서 얼마를 『스톡홀름에서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한 사람인 젊은 요한센』에게 베끼게 하였다. 1783년[죽은 지 11년], 놀덴쉘드는 영국에 스베덴보리가 쓴 책들을 인쇄할 목적으로, 한 협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듣고, 젊은 요한센이 베낀 것과 원본의 얼마를 - 특히 「계시록 풀이」의 원고를 - 영국에 가지고 갔다. 거기에서 그 책은 나중에, 헨리 페킷트가 낸 비용으로 인쇄되었다. 그 원고가 페킷드가 간직하고 있는 동안에 불이 났지만, 그것은 아주 기적처럼 불길에서 벗어났다.

 

노예를 없애야 한다고 부르짖는 바트스트렘은, 아프리카에 새 교회의 식민지를 만들겠다는 뜨거운 마음에, 1788년[죽은 지16년], 런던에 이르렀을 때, 스베덴보리의 원고 둘째 부분을 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는 「영계일기」의 거지반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 문서들을 프랑스의 외과의사 베네디 샤스테니에의 손에 두고 갔다. 베네디는 새 가르침을 넓히려는 열렬한 마음은 가졌지만, 「일기」는 출간하지 못했다. 그는, 늙고 가난에 쪼들리어, 몹시 추운 밤에 감기로 에딘바라 근처에서 세상을 달리하자, 그 귀중한 「일기」는, 여러 신사의 손에 넘기어져서, 얼마동안은 간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협회는 60년이 지나서 그것을 거두어 들여, 앞서 빌렸던 원고와 함께 스웨덴 과학학사원에 돌려주었다.

 

그동안 J. F. 임마누엘 탓펠 박사는, 그 일기의 일부를 튜빙겐에서 인쇄하였다. 이후, 학사원은, 앞으로는 스베덴보리의 원고는 모두 결코 빌려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결정을 하였다.

 

그 후, 몇 년을 거쳐서, 아메리카와 영국에 있는 여러 얼거리(기구)의 노력으로, 또 루돌푸 레오날드 탓펠, 알푸레 헨리 스트로, 그 밖의 사람들 수고로 쓰였고, 오늘날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여러 방법, 곧 사진돌판, 포토타이프, 복사 사진기로 정확하게 복각 되어서 간직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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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가 묻힌 프린시스 너른 마당(광장)에 있는 작은 교회가 큰 런던 건설 때문에 헐리게 되자, 왕립 스웨덴 과학학사원은 스베덴보리의 무덤뼈(유해)를 그의 고국으로 가져오는 계획을 시작하였다. 이 스웨덴이 낳은 잘난 사람의 주검뼈(유골)를 모시는 영예를 스톡홀름, 발네엠 수도원, 웁살라, 이렇게 세 곳이 겨루었다. 1908년[죽은 지136년], 임마누엘 스베덴보리 관은 장엄한 의식을 마치고, 영국을 떠나 스웨덴 정부가 보낸 순양함 필리아 호에 실리어 운반 되었다.

 

5월 18일, 엄숙한 의식과 함께 그 관은 웁살라 큰 성당 안에 스베덴보리와 한 시대를 산 이름난 카르르 린네의 관 옆에 잘 모시어졌다.

 

역에서 교회까지, 만장으로 꾸며진 대학 거리를, 한 행렬이, 스베덴보리의 가족이 앞서고, 그 뒤를 수많은 단체의 대표자가 이어서 나아갔다. 학생들은 교회당 곁으로 난 복도를 노래 부르면서 나아가고, 나라 안팎의 단체와 개인이 보낸 꽃다발에 덮인 관의 곁을 지나갈 때에는, 그 깃발을 내려서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라틴말과 스웨덴말로 지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몇 편의 시를 읊고, 큰 감독은 스베덴보리가 어린이들에게 보여준 애정을 기리는 표시로서 작은 아이들로 꾸며진 강단에서, 죽은 이를 기리는 말을 하였다.

 

2년이 지나서, 스웨덴 정부는,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돌로 만든 관을 스베덴보리에게 드렸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처음 시기부터 회원이 되었던 웁살라 과학협회 2백년 잔치 행사 때에 행하였다. 이 행사에는 국왕 부부가 참석 하였다. 스베덴보리의 무덤 뼈를 영국에서 옮겨오면서, A. F. 알렌이 읊은, 라틴말로 지은 서정시는, 눈부셨던 그의 평생과 저작(지은 책)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는 공경하고 사랑하는 정을 알맞게 나타내고 있다.

 

 

그 번역을 여기에.

 

 

아! 지극히 크신 스웨덴 사람아,

우리들, 당신 나라가, 이날 당신을 찾기에,

당신이 태어난 땅에,

당신의 뼈만 바치네.

 

어떤 노래로 우리가, 당신의 마음이 행하신 엄청난 일을 나타낼까.

어떻게 당신에게 어울리는 자랑거리 말하여,

그리도 크신 하늘이 내리신 재능을 참되이 기리랴.

해서 우리들은 슬퍼한다.

바라옵기는 우리들 힘써서 하늘의 비밀에 통하게 되기를.

또한 자연의 깊숙한 대궐 안을 떠돌지 않도록.

당신이 만일 우리들 길잡이가 되어 주신다면,

길은 참으로 밝으리라.

 

하지만,

아! 들린다.

막 나팔소리 울리고, 돛은 바람에 가득 부풀었네.

군함은 조용조용 움직여 간다.

“안녕!” 하고 외치는 소리, 빠르게 뒷걸음쳐 가는 물가에서

메아리친다.

높고 귀하신 사도여!

지금 당신 조상의 땅에 돌아갈 지어다.

당신을 기리는 소리,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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