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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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오란다, 프랑스, 이탈리아로 여행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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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란다, 프랑스, 이탈리아로 여행

 

 

1736년 [48세]7월 10일, 스베덴보리는 네 번째 외국여행을 떠나려고 하였다.

 

 

이번에는 3년 또는 4년 동안의 부재허가를 얻었다. 이렇게 오랜 동안의 허가를 얻기 위하여, 그는 일벗(동료)들과 약속을 하였다. 곧 광산국의 일벗 세 사람 사이에, 그 일의 의무와 함께 봉급의 절반을 나우어 주기로 하였다.

 

서기관 포라트 에게는 3백 다레루, 나머지 3백 다레루를 변호사 비엘 - 케니우스와 남작 케델스트렘에게 똑 같이 나누기로 하였다.

 

 

어째서 스베덴보리는, 본국에서 막 1년을 보냈는데, 「원리론」을 낸지도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대륙여행의 위험을 무릅쓰고자 하였는가, 그것은 약속한「원리론」의 이음 편을 내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는, 본국에 돌아오자, 그 일에 매어 달렸다. 이제 그것은, 그가 외국의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금만 더 모르고, 또 외국 학자들의 소견을 참고하기만 하면 될 정도이었다. 그가 지은 책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서, 그것을 끝내는데 는 생각을 깊이 모으는 일가, 자질구레한 일들의 번거로움을 피하는 것이 필요하여서 이며, 동시에,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관지그이 의무를 다 할 수는 없다.

 

 

「원리론」뿐만 아니라, 「무한하신 분에 관하여」따위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더욱 더 날카롭게 요지(要旨)를 펼치기로 마음먹었으며, 뒤에 지은 책의 107쪽에는 넋을 기계에 비유해서, 『이 주제에 관해서는 이어서 출판될 책에서 자세히 말하리라』고 말하고, 다음 쪽에서는 『그 책에서 나는 넋은 완전히, 또 높은 뜻에서 순수하게 기계 같은 것이며, 우주가 죽어서 없어지지 않는 한,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광산국 분위기는, 해부학과 심리학 분야라는 전혀 다른 데에 이 철학자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멀고도 깊은 궁리(사색)를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스베덴보리가 재주 많은 데는 레오날드 다빈치에 비기지만, 다빈치는 음아고가 그림에, 거기에서 다시 공학과 발명과 꾸밈(장식)에 , 그의 주의를 나누어 주었다. 그들 두 사람의 평생은, 참으로 종종 나란히 금(평행선)을 가는 것같이 보인다. 두 사람은 자연에 관하여 궁리하고, 두 사람 모두 전문분야만을 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늘날 발명의 길잡이(선구자)이며, 그 시대보다 훨씬 앞서 갔다. 이제는 스베덴보리는, 칼르스베르이 성에 가서 임금님에게 인사차 떠난다는 말을 드렸는데, 임금은 매우 반갑게 그를 맞았고, 부재허가를 내려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드렸다.

 

 

7월 17일, 그는 덴마크로 건너가 코펜하겐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이름난 학자들을 찾아뵙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크리스천 붤브가 지은 책에서 요점들을 가려 뽑고, 코펜하겐에서『거리 모두는 이득 말고는 아무것도 숨 쉬지 않는』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오란다 공화국의 조직형태에는 좋은 느낌을 가졌다.

 

 

『나는 여기에서, 주님은 왜, 이런 상스럽고 탐욕스러운 백성에게 이러한 훌륭한 나라를 주시고, 그들에게 복 주시기를 좋아하셨는지, 어째서 주님은 그처럼 오랜 세월, 모든 불운에서 그들을 지켜주셨는지, 왜, 상업과 기업에서 그들을 다른 모든 나라들보다 뀌어나게 하셨는가, 그 나라는 유럽뿐만 아니라, 다른 곳의 재물까지도 거의가 흘러드는 곳이 되게 하셨는가를, 생각했다.

 

 

그 중요한 원인은, 그것이 공화국인 것인데, 주님은 군주국(君主國)보다 공화국을 기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과로, 누구든지, 자기 자신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억지로 명예와 존경을 드려야 한다는 얽매임과 의무가 없다는 생각으로, 신분이 높은 자나 낮은 자도 왕과 황제와 똑같은 값과 중요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또 오란다의 모든 사람이 타고난 성미와 바탕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믿음도 두지 않고, 존경과 높임의 감정으로써 우러러볼 분은 오직 주님 한분만 계시고,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높임을 받고, 어떤 사람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을 때, 주님은 제일 기뻐하신다. 나아가서 사람마다, 그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누리며, 거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마음이 나온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말하자면, 스스로의 왕이면서, 가장 높으신 분의 정치 밑에서 다스리기 때문이다.

 

 

더더욱 이것으로, 그들은 두려움과 소심(小心)함과 지나친 조심성으로, 용기와 독립된 이치에 맞는 생각을 잃지 않으면서, 완전히 자유롭게 또 억압도 없이, 가장 높으신 분에게 그 넋(혼)이 향하게, 높이 올리고, 그분을 공경할 수 있는 것이 생기며, 그분은 그 예배가 다른 어떤 자와 나누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왕후(王侯)의 힘에 눌려 있는 자들은 아첨과 거짓 속에서 키워져,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배우고, 이런 것이 버릇으로 뿌리내리면, 거기에서 어떤 두 번째 성질이 생기고,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까지도, 이런 사람은 제 생각과 달리 말하고, 주님에 대한 것까지도 마음에도 없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일은 주님에게는 매우 불쾌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것이, 오란다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완전한 복을 누리는 까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란다.. 지금의 네덜란드, 또 화란이라고도 한다.(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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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에서, 1736년[48세]8월 18일쯤, 스베덴보리는 「동물계의 얼개(구조)」에 대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이 책 지음에 매달렸을 때, 처음으로, 초자연의 경험이 따랐다. 그는, 금사자라고 부르는 여관에 묵고 있었는데, 깊은 명상 상태로 들어간 때, 정신을 잃은 상태가 되었는데, 그것이 잠깐씩 이어졌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까, 그는, 그 정신 나간 형편이 그의 머릿골(두뇌)을 말갛게 하고, 그의 생각을 정돈하여서, 그에게 더 뛰어난 깊이 살피는 힘(통찰력)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지금 다루고 있는 그 놀라운 책 가운데에는, 숨겨진 진리에 대한, 이 깊고도 명확함의 결과로 생긴 것을 극히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결론은 깊은 연구와 합리적인 연역(演繹)에 바탕을 두지만, 결론은 바르다고 하는 평안함과 내적인 확신에도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일들을 내게 표적이 있기 때문에 바르다』하였고, 또 그가 질서 잡힌 창조의 전반적인 이론을 요약하고 있는 원고 끝부분에 쓴 『그 표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얼개(구조)의 첫째 권에 밝혔는데, 거기에서,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쓰고 있을 때 『한 가지의 마음 즐거운 빛과 기쁨에 넘친 번쩍이는 빛(섬광)』에 마음이 잠겨 졌을 때, 그 일로 진리 탐구하는데 힘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것은 『한 신비한 빛이 쏘아비치는 것이요, 나는 그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는 모르지만, 머릿골의 거룩한 관자놀이를 꿰뚫은 것이다.』

 

 

그는, 이 표적을 뒤에 다시 적고 있다.『내가 어떤 자그마한 책을 쓰는 동안, 여러 달을 집화로의 불길 같은 생생한 불길을 거의 매일 같이 보았다』고 기록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동의 하시는 표적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책 가운데서 보기 시작되는 그런 종류의 맨 처음 기사(記事)이다.

 

이해에 또 스베덴보리는, 비로소 그 꿈을 적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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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그는 암스테르담을 떠나 파리를 향하여, 운하 선으로 벨기에를 지나 롯델 담에 갔다. 1736년 [48세] 9월 3일에 파리에 이르러, 거기서 일 년 반쯤 머물렀다. 스베덴보리는 파리에서 해부학을 배운데 관해서는 말 한마디가 없지만, 그 연구에 관계한 것은, 뒤에 해부학에 관한 책 모두에 걸친 기록을 볼 때,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는 그동안, 해부학에서 큰 책인 「동물계의 얼개(구조)」를 쓰는 일에 폭 빠져 있었다. 그 원고는 여러 번 고쳐 썼고, 해부학 재료가 늘어남에 따라서, 책을 쓰는 계획도 여러 번 바뀌었다.

 

 

1738년[50세] 3월 2일, 스베덴보리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거기서 다시 1년 반 동안 있었다. 1739년 [51세], 그는 로마를 떠나 제네바를 거쳐 5월 초순에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스베덴보리는 암스테르담에가, 거기서 「동물계의 얼개 제 1권을 끝냈다.

그가 원고 끝머리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적었을 때, 그의 마음은 깊은 흐뭇함으로 꽉 찼다.

 

『1739년[51세]12월 27일 12시, 원고 쓰는 것을 마침』

 

 

 

바야흐로 제 1권은 인쇄에 부치게 되었고, 대강 아홉 달 걸려서 판짜기와 바로잡음이 끝났다. 1740년 [52세]9월 초순, 그는 헤그로, 친구인 프레이스 대사를 찾아뵙고, 그달 10일에 출판된 그 책 한권을 우편으로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덴마크에서, 10월 24일, 「얼개」제 1권 한부에 이름을 적어, 코펜하겐 왕립도서관원인 그람 박사에게 드렸다. 11월 3일, 다시 스톡홀름에 돌아와서 관직에 종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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