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생애와 신학사상

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창조의 목적, 그것은 사람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20:00
  • hit269
  • vote4
  • 59.14.12.219

창조의 목적 그것은 사람

 

 

「원리론」에서는,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끝이 없는 이 (무한자)와 끝이 있는 것을 다루는데 지나지 않았다. 끝이 없는 이는 하나님 같이 보았고, 끝이 있는 것은 공간과 시간에 딸린 것 같이 보았다. 정신(영), 또는 끝이 없는 이와 끝이 있는 것 사이에서 이 둘을 맺어주는 것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철학은, 그를 유물론자라고 자리매김을 할 수 없고, - 왜냐하면, 유물론자는 끝이 없는 자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 또 관념론자로 자리매김을 할 수도 없는데, 관념론자는 정신과 신과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1734년 [46세]에 「원리론」이 완성되어, 스베덴보리는 라이프치히에서 그것이 인쇄에 들어가는 것을 본 후에, 끝이 없는 자와 끝이 있는 것의 관련성의 문제가 마음속에 일어나서, 그것을 대담하게, 또 날카롭게 다룬 작은 논문을 썼다.

 

 

그에게는, 창조한 모든 것은 목적에 대한 수단이요, 창조의 목적 그 자체는, 또는 맨 나중 목표는 사람이며, 죽을 수 없는 영혼을 지닌 정신적(영적)인 존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끝이 없는 자』를 다룬 논문은, 사람 영혼의 죽지 않음(不死性), 또는 없어지지 않음(不滅性)을 증명하는데 힘썼다. 그것은, 그것을 믿지 않는 철학자들을 위하여 쓴 것 같으며, 특히 이 지은이가 학문세계 전반의 사상흐름(思潮)이 무신론에 기울고 있음을 충분히 생각하고 쓴 것으로, 거기에는, 한 슬픔과 설움의 감정이 흐르고 있다.

 

 

이 책을 한 달도 안 걸려서 썼다. 그는 『이 주제를 상세하게 깊이 다루려고 하면, 한 달이 아닌 여러 해가 걸릴 것이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것이 열려 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실마리가, 이 『끝이 없는 이』논문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우주(大宇宙) 곧 물리적 우주에 대한 연구와, 소우주(小宇宙)곧 축소된 우주인 인간에 대한 관심과 중요한 고리를 이루고 있다. 이 책에서『얼거리(기구(機構))』라는 말은, 스베덴보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관명의 흥미 깊은 한 보기이다. 나중에 이 말 곧 얼거리(기구)는, 여기에서는 영혼 또는 정신(=영)이라고 하는 끝이 있는 것의 질서 있는 활동을 포함한 물질적인 것에만 쓰고 있다.

 

 

그는 먼저 그 책에서 이렇게 내세운다. 만일 철학이 참으로 합리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로 종교와 어그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자는, 종교의 신성한 주제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는 단정으로, 그 주제에서 떨어져 나가면 안 된다.

 

 

잘못은 끝이 없는 자에 대하여 논하는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에서, 곧 그것을 끝이 있는 영역에 있는 것과 대조하는데서 생긴다고…….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사이의 비율에 관해서는, 그것은 아무것도 없다. 끝이 있는 것을 아무리 잘게 나우어도, 끝이 없는 데는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다.

 

 

어떤 철학자들은, 자연과 신은 같다고 결론을 짓는다. 이러한 이론으로 그들은 마침내, 자연을 예배하는 자가 될 것이다. 끝이 있는 것은 원인이 없으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무한한 것이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다.

 

 

맨 처음의 근원적 실재 - 맨 처음 창조된 형체 -의 성질에 대해서, 스베덴보리는 「원리론」을 찾아보라고 한다. 보기를 들면, 그 근원적인 것 중에는, 수없는 결과를 낳은 능력이 있다. 우리들은 정밀하고 교묘하게 만든 시계와 같은 기계 가운데서, 차바퀴에는 느끼지는 않고, 『발명가에게 있는 그 얼거리(기구)의 원인』에 느끼는 것처럼, 결과를 볼 때, 그 결과의 원인에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연을 예배함에 따라 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들은 두 가지 일에 따라서, 곧 자연을 두고 봄으로써, 또 사람 몸의 짜임새를 두고 봄으로써, 하나님을 인정해 준수 있게 된다. 이런 놀라운 결과는 우연히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이지(理智)에서 떼어낸 원인을 어림잡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원소가 질서를 지닌 맨 처음 것에서 나와, 같은 질서를 지닌 나중 것에 미칠 수 있게 하는 힘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 그지없으신 하나님은 우주를 처음 세우신 분이시다. 이 이론을 떠나서, 사람의 넋(영혼)안에는 하나님의 계심과 그지없음(무한성)을 인정해 주는 타고난(先天的)것이 있다. 진리는 스스로 뚜렷하다고, 그는 말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계심과 그지없음을 우리들에게 가리키는 우리 넋의 감정은, 그 넋이 계발되어서 갈닦기(陶冶)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타고난 대로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이론 말고는 어떤 힘도 쓸 줄 모르고, 자연을 신성으로 보는 철학자는, 낮고 속된 우상숭배자와 아무런 다름이 없는바, 나중의 것은 이성의 열림(개발)이 모자라고, 앞의 것은 넘친다(過剩).

 

그지없는 것과 끝이 없는 것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것도, 기하학적인 것도, 물리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그지없으신 분과 끝이 있는 것과의 관련은, 하나님의 독생자 - 예수 그리스도 - 로 인하여 가져온다. 그래서 그 관련은 그 자신 무한 것이다. 무한하신 분의 성질을 탐구하는 데는, 이성은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람은 창조에서 맨 끝 결과이고, 하나님의 목적인 것도 안다. 모든 것은 사람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함께 일하고 있다.

 

 

하나님의 목적을 다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합리성을 주셨다. 사람 속에는 무언가 하나님 같은(신적)것이, 또 무언가 하나님의 것을 받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목적은 다할 수가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해 줄 수가 있고, 또 인정해 주기도 하고, 하나님이 무한한 것을 믿을 수가 있고, 또 믿기도 한다. 비록 사람은, 하나님의 성질을 모르더라도, 그의 계심을 인정해 줄 수가 있고, 또 인정해 주기도 한다. 사람은 끝이 없는 분과의 특별한 관계에서 생겨나는 사랑, 또는 기쁨을 깨닫는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그 안에 들어 있는 맨 끝 결과인 사람에게 있는 참 신성은, 하나님의 계심과 끝없음을 인정해 주는 것뿐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뻐하는 깨달음(지각)일 뿐이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 cy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