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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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삶과 사상 - 아버지와 나라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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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라

 

 

스베덴보리는 1733년 [45세], 철학을 다룬 큰 작품 쓰기를 끝내자, 외국에서 그것을 출판하려고 부재허가를 신청했다. 그 허가가 떨어지자, 5월 10일에, 그의 세 번째 여행을 위하여 스톡홀름을 떠났다.

 

 

1733년 9월4일. 그는 라이프치히에 도착하였고, 거기에서 「원리론」인쇄에 들어갔다. 「이번 주에 여섯 장을 인쇄하였다. 하나님이여, 지켜 주소서!」라고 그는 외쳤다. 그것을 인쇄하는데 거의 한 해가 걸렸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때를 다른 논문 쓰는데 썼다. 그는 세 권으로 된 「철학. 광물 논문모음」말고도 「한없는 것에 관한 철학개설(philosophica ratiocinantis de Infinintio)」를 출판하였다. 그의 일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라이프치히에서 나는 캇셀에 가서, 그 동네와 슈말칼덴 사이에 있는 모든 광산을 찾아보았다. 거기에서 고-타를 지나서 부른스윅에 갔으며, 거기에서 함부르크에 갔고, 나중에는 이스탓드를 거쳐 스톡홀름으로 돌아왔다. 나는 1734년 [46세]7월, 국회 회기에 댈 수 있도록 집에 돌아왔다.』

 

 

스베덴보리가 지은 세 권의 「철학. 광물학 논문모음」중에서, 첫째권인 「원리론」은 - 그것은 자연에 관한 그의 철학을 완전히 한 체계로 정리한 것인데 - 부타운슈붸의 례네부르그의 루드뷔히 루돌프 공작(Duke Ludwig Rudolph of Braunchweig Iuneburg) 에게 드렸다. 「솨와 강철」을 다룬 둘째 권은, 헷세 갓쎌의 란드그레베에게 드렸고,「구리와 놋쇠」를 다룬 셋째 권은, 스웨덴 왕 후레데릭 1세 에게 드렸다.

 

 

여러 해를 거쳐서, 혼을 쏟아서 쓴 이 호화로운 출판물들은, 학문세계에서 큰 칭찬을 받았다. 이것들은 선명한 인쇄와, 질이 좋은 종이 때문에, 더욱 칭찬을 받았고, 또 여러 사람들에게서 자세한 논평을 받았다. 『진리탐구에 대한 치열한 노력과, 자연철학에 대한 드물게 보는 투철한 힘이, 책 전체에서 빛나고 있다』고, 『학계회보』는 논평하였다.「쇠와 구리」를 다룬 그의 성실함과 명쾌함은 남달리 칭찬을 받았다. 예들 들어, 녹는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녹히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오래도록 또, 하찮은 데까지 마음을 써서, 감추고 있는 비밀을, 더없는 성실함으로써 밝히 보여준다. 지은이는 몇 세기에 걸친 힘든 일과, 부지런히 힘써 경험으로 얻은 비밀을 사회에 알린다는 것은 공정한 것이 아니라는 공허한 핑계로 제 기술의 지식을 다른 데 주는 것을 치사하게 여기는 자들의 해 끼치려는 마음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욱 스베덴보리는, 아주 조심스레 광물계를 다룬 이 책에서, 두 부(部)이상은 내 것이라고 주장도 않고, 또 발표도 않고, 그 3부는 다른 이들이 쓴 책에서 모은 것이라고 솔직히 말하고 있다. 씨(氏)는 거의 유럽에서 쓰고 녹이는 과정을. 그처럼 명백하고 자질구레한 조목에 까지. 그처럼 주의깊이, 또 그처럼 성실하게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이것을 읽는 이는, 마치 작품 그것을 제 앞에서 보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읽는 이는, 낯선 이들에게는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낱낱이 검사하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건물과 도구에 자물쇠를 잠그어, 쫓아내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 것이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쓴 초기의 한 편지를 생각게 하는데, 그는 거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독일학회 회보.라이푸치히, 1734년 10월호, 407~420쪽.

** 벤세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1724년 2월 4일에 보냄. A. 액튼 엮음「편지와 각서」327~328쪽.

 

『내가 지금 당신에게 보내는 것은 실지로는 비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외국인들이 이것을 손에 넣어, 어느 정도, 그것들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 단순한 생각은, 야금학에서는 털끝만치도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이 없으면, 아무도 자연을 탐구하는데 아무런 진보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핀란드의 광산주인, 야곱 휠스게에게서 편지를 받은 것은, 광물학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도움을 받은 이는 학자만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이 편지 임자는, 유익하고 아주 필요한 저작 한 부를 구하고, 그런 천재가 그 나라에 나타났다는 것을 마음 깊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바야흐로 『먼지 가운데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까지도, 그 어둠을 비추는 빛을, 과학을 잘 아는 매우 귀하고 또 참으로 칭찬을 받는 당신의 지은 책에서 얻게 됩니다.』[핀란드 크로스키스 철공장. 1734년 [46세] 8월 27일].

 

 

깊은 학식이 넉넉한 광물학자, 후리드리히 헨켈 고문은, 삭소니의 후라이부르그에서 편지를 스베덴보리에게 보내서,『중요하면서도 힘들고 어려운 일』인 광물학 사전을 편집하는데 즈음하여, 스웨덴의 광물학에 관하여 무엇이든지 원고를 보내 주기를, 또 도움을 받고 싶다고 청하고 있다.

 

 

쇠를 다룬 책은, 요즈음 스웨덴마로 번역되었고『광물학 역사에서 기본적인 것』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스베덴보리가 무쇠를 강철로 바꾸는 방법을 발표한 논문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어, 그것이 세상에 출간된 지 3년 후, 「알사스의 강철에 대한 논문」의 지은이는, 스베덴보리의 지은 책에서 몇 장(章)을 받아 들였다. 그때까지, 알사스 사람들은 외국에서 가장 잘 단련된 강철을 수입하고, 강철 만드는 법의 가르침을 주는, 프랑스말로 된 책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광석을 강철로 바꿀 수가 있다면, 많은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762년 [74세]에, 쇠를 다룬 모든 지은 책은 프랑스말로 옮겨져 출판되었다.

 

 

「철학. 광물학 논문모음」출판으로, 스베덴보리는 그 시대에서 가장 학식이 있고 또 가장 이름난 학자의 한 자리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자리가 그가 연구하는 목적이었을까. 그 대답은 「내가 사람들에게서 좋은 평을 얻든가, 또는 아무도 좋은 평을 하지 않든가, 그것은 내겐 아무 문제가 아니다. 내겐 사람들에게, 세상의 꾸밈으로도 되어 있는 이름높고, 또 재능이 있는 여러 가지 지은이들의 원리를 물리치고, 그 대신에, 내 원리를 받아들이라고 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다. 만일 내가 제창한 원리가, 그 속에, 다른 이들에게서 옹호를 받는 원리보다 더 많은 진리가 있으면, 사람들은 때가 이르면 거기에 동의하겠지요. 그것이 지금이 아니라면, 어느 앞날에라도.」

 

**********

 

스베덴보리는 1734년[46세]7월 3일에 다시 광산국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다음날 칼스베르이 성에서 열리는 왕비의 명명축하회(命名祝賀會)에 참석하기 위한 부재허가(不在許可)를 받았다.

 

 

그 때 스웨덴은, 처음으로 싸움에 지은 쓴잔을 마시게 한 러시아에 반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발틱의 여러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이 맺혀 있었다. 대중은 이제라도 총을 들판이었으나, 정부는 현명하고, 생각이 깊은 지도자인, 추밀원의장(樞密院議長)알빗드 호룬에 의하여 통솔되고 있었다. 그도 대중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그의 성냄은 정치성과 깊은 생각으로 진정시키고 있었다. 후레데릭 왕은, 일찍이 호룬과 그의 한 무리가 경솔하게 행동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나이트 캡』이라고 불렀다. 이 캡이라는 별명은 그들을 대항하는 젊은 쪽이 붙인 고마운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해트(hat)』라고 부르면서, 나이트 캡을 쓰고 편안한 잠을 탐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벽창호를 배척하고, 해트를 머리에 쓰고, 언제라도 행동으로 옮길 용기 있는 애국자들에게 자리를 물러주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저 영웅이었던 찰스 12세 때를 그리워하며, 전쟁에 진 쓰라림과, 매우 심하게 거두어들이는 세금 때문에, 깨어져 멸망했던 일들을 잊고서, 찰스의 빛나는 승리만을 되살렸다.

 

 

새로운 한 무리들은, 자유의 이름으로 싸움을 바랐다. 그들은 카르트 이렌보르이를 우두머리로 하고서, 폴란드 왕의 후보로 레크스만스키를 내세우고, 독일 황제가 지지하는 러시아의 후보자를 대항하였다. 문제의 초점은, 스웨덴이 러시아와 감히 싸움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일을 정하는 1734년[46세] 국회 비밀위원회의 회원이었다고 생각되며, 그 「의회에 보내는 청원서」안에 정치문제에 관한 청원서 초안이 남아 있으며, 거기에는 힘차게 「러시아와 싸우는 것을 반대하는 견해」를 말하고 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요긴한 내용은 이렇다.

 

 

스웨덴은, 지금은 옛날과 같은 굳세고도 큰 힘이 없다. 이 나라는, 지금은 작은 군대밖에 갖지 못하며, 또 기나긴 싸움을 뒤 받쳐줄만한 돈도 없다. 프랑스로부터는 약속한 것 말고 바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거기에 반하여, 러시아는 전보다도 지금은 더 힘이 세졌다. 그 군인은 잘 훈련을 받았으며 장비도 좋다. 그래서 비록 스웨덴이 그래도 발트 해의 어느 한 나라를 되찾는데 성공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질투가 심한 이웃나라들이 쳐들어 올 위험 속에 내맡기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싸움은 되찾게 된 나라에서 얻게 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이 나라에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만일, 스웨덴이 중립을 지키고, 자원을 아껴서 광업과 상업에 힘쓰도록 권한다면, 싸우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게서 이익을 얻는 것이 된다. 비록 만에 하나, 스웨덴이 싸울 수밖에 없게 되더라도, 쳐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이롭고, 그때에는 침략을 위한 싸움이 아닌,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된다.

 

 

명예는, 가장 큰 명예는, 어질고 밝은 아낌으로, 또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 노력으로 한 길을 가는데 있다. 『그 때에는, 우리들은 오란다와 영국처럼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이 두 나라는 온전히 이 순단 으로 유럽의 큰 나라 사이에 있으면서, 그 명예를 지켜오고 있습니다.』이에 대하여 물론, 다른 나라들이 스웨덴은 가난과 어려움에 지쳐 있다고 믿고 있는 때에 싸움을 선포하는 것은, 힘을 실지보다 더 크게 보여주는 것이 된다고, 말을 펼 수 있을 것이다. 좋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믿게 놔두라. 그렇게 하는 쪽이 지금은 단지 주장하는데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 되어, 나라를 고달픈데 빠뜨리게 하는 싸움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유리한 계책이다. 『단순히, 내게는 힘과 용기가 있다는 것을 보내어서 보여주려고 다른 나라를 치는 것은 잘못된 명예이지만, 남이 쳐들어 올 때에, 용감하게 제 나라를 지키는 것은 참 명예입니다.』

 

 

이것은 그 청원서에 있는 내용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나, 해설자인 탓휄 박사는 『이 청원서는 국회의 비밀 위원회에 큰 영향을 주어서, 떠 다시 육년 동안 스웨덴이 싸움의 두려움과 비참한 패전의 굴욕을 벗어나게 된 것이 하나는, 스베덴보리의 영향이었다고 해도 좋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1738년[50세],알빗드 호룬은 억지로 물러나게 되었고, 싸움을 좋아하는 「해트 당」이 대신하였고, 얼마 안가서 러시아에 싸움을 선포하였으나, 그것은 스웨덴을 더 비참하게 한 것뿐이었다. 1743년[55세], 에보의 강화조약으로, 스웨덴은 넓고 큰 핀란드 지구를 러시아에 끊어주었으며, 러시아 여황제와 촌수가 가까운 일가인 홀스타인의 아돌푸 후레데릭을 스웨덴 왕국의 후계자로 삼으라는 억지요구를 받게 되었다. 이런 일은 스베덴보리가 올린 정책이 현명하였다는 것을 너무 늦게 증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싸움에 질 때에 생길 강제된 왕위계승문제까지도 정확하게 미리보고 있기 때문이다.

 

 

1735년[47세] 3월과 4월 사이에, 광산국의 간부 중 몇 사람은 병에 걸려 일을 쉬었지만, 스베덴보리는 나가서 일하였다. 아마 인프렌자(독감)가 돌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해 7월 스베드베리 감독은 돌아갔다. 그 장례식은 관례대로, 훨씬 날을 늦게 잡아서 행하여졌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와 벤세르스테나가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는 허가를 청한 것이 1736년[48세]1월 10일, 장례식 날짜는 29일이었기 때문이다.

 

 

부른스보에는 임마누엘에게 활기에 찬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정든 물건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 은촛대 둘은 웁살라의 학생시대를 생각나게 하였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학문은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아니, 참으로 해롭습니다.』고 충고 하였다.

 

 

『경건과 성실은 행복을 위한 차림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고 스베드베리는 굳게 믿고 있었다. 양심이 나아가야할 길을 가르칠 때에는, 겁 없이 따르는 것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 두 성격은 아들 임마누엘에게 내리 전하여졌다.

 

벽에는, 감독의 모습을 새긴 훌륭한 구리판(동판)이 걸려 있었다.

 

 

감독은 그 성서 앞에 곧바로 서서, 손가락은 성서를 가리키고 있다. 이 구리판은 1712년[24세]2월 어느 날 밤에, 갑작스레 일어난 불길에서, 기적같이 건져낸 것이었다. 두 시간도 못가서 목사관과 그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재가 되어 버렸지만, 그 구리판만이 아무 상처도 없이 되찾게 된 것이다. 그때에 외국에 있던 임마누엘에게 이 소식이 갔을때, 그는 이일을 라틴말의 시문(詩文)으로써 기념 하였다.

 

 

이 어질고 착한 감독은 참말로 화재에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살아가는 동안에, 네 번, 집이 불에 타버려서, 도서실 책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맨 처음 큰불은, 웁살라에서 마침 그 훌륭하고 새로운 집이 다 된지 얼마 안가서 일어났다. 둘째 번은, 1702년[14세]에 큰 불이 동네를 다 태워버린 때였다.

 

 

부른스보의 저택은 1712년 [24세]에, 다시 1730년 [42새]에 타버렸다.

 

 

왕립기록보관소에는, 감독이 쓴 편지가 몇 통 있는데, 거기에는 폐하에게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비통한 것이 들어 있었다. 『책 한권도 없이 타버려, 책. 옷가지. 살곳. 모든 것을 의존해야 할 사람.』 이 사람이 맨 먼저 구한 것은 책이었다!

 

스베덴보리의 아버지는 아주 많은 글을 썼을 뿐 아니라, 몹시 책 읽기를 좋아한 사람이기도 했다.

 

 

스베드베리 감독은 여러 번 겹친 불운에도 끄떡하지 않았으며,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뒤에, 옛날 욥에게 하셨던 것처럼, 내게도 모든 것을 갑절로 물려 주셨으며, 더욱 쾌적한 집과 있을 곳을 내려 주셨다.』그는 특별한 하나님의 보살피심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깊이 믿었다. 예를 들어, 그는 미국에 있는 스웨덴 교회원의 수석목사로서 거기에 써 보낸 편지에서, 종이 한 장도 잃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일찍이, 실지로 배가 거기에 실은 모든 짐과 함께 바다에서 깨어져 나간 때에도, 그 편지 뭉치는 후란다스 바닷가에서 어부에게 발견되어, 미국에 다다른 배의 선장에게 맡겨졌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손을 내가 쓴 것에 까지 뻗쳐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로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일을 실천할 것을 세게 조르는 것입니다.』고 헷세리우스에게 썼다.

 

 

그가 제 재산을 털어서 책을 낸 「찬송가」가 몰수된 일은, 그의 평생에서 끝까지 그를 괴롭혔다. 그 노래 모음에는 스스로 지은 뛰어난 찬송가가 몇 편이나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광신(狂信)이란 불도장이 찍히어 문책을 받았다. 왕비가 그에게 약간의 부수를 미국에 부쳐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을 때, 그는 임마누엘에게, 그것을 나를 위하여 받아두라고 일렀다.

 

 

『만약에 네가 열권의 허가를 얻으면 쉰 권을 가져라』고 냉정하게 명령하고 있다.

 

 

결국 책은 그의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비록 학문을 하는데 는 아주 달랐지만, 가까운 사이였다. 『나의 「설교모음」은, 지금 검열을 받고서 되었단다.』고 감독은 임마누엘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편지에 써 보냈다.『만일 네가 그 비용을 댄다면, 너는 그 일로 대단한 이익을 받을 것이다.』바야흐로 이 높은 감독의 싸움도 끝이 났다. 그의 주검은 가까운 수도원에,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사라 베엠의 주검 곁에 묻혔다. 에스바 스베드베리는 종종 감정을 곤두서게 하는 독단과, 그 논의할 나위도 없는 에고이즘(이기주의)과, 자기는 언제나 올바르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참 기독교도요, 주님의 경건한 제자요, 땅 위에 하늘의 왕국을 비취는 교회 세움에 쉬지 않고 힘썼다. 그는 「믿음으로 만의 가르침(교의)」을, 또는 구원을 얻는데, 일은 필요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끊임없이 공격하였다.

 

 

사람은 얼마쯤 죄를 짓는다고 해도, 교회에 가기만 하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생각은 큰 잘못이다. 그런 자를 사람은, 선량한 루터파 회원이라고도, 선량한 기독교도라고도 부를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묻는다면, 그는 『물론, 내게는 믿음이 있습니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악마의 믿음이다!

 

그는 여든 두 살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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