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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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를 증명하다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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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14.12.219

홍수를 증명하다

 

 

후레데릭스할의 참호에서 왕의 머리를 뚫고 지나간 총알은, 한 글월(문장)의 마지막을 가리키는 마침표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이른바 『대제왕조(大帝王祖)』의 끝장이었다. 이 왕조는 구스타브스 아돌후스가 30년 전쟁 동안, 대륙에서 승리 한 때에 시작되어, 찰스 12세가 머리에 쓴 왕관은, 그를 스웨덴에서만 아니고 필 랜드, 잉겔만드, 에스토니아, 릿후란드, 포메라니아, 뷔스말, 브레멘, 스텟렌, 뷜텐을 다스리는 이로써, 그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께만 책임질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배제(配劑)는 스웨덴의 위대함을 늘려 나가는데 만 쓰이지 않았다. 러시아도 또한 빨틱 바다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 때문에 단순한 젊은이가 뒤를 잇고, 그가 영웅적인 결의를 북돋도록 편 들어준 커다란 책임은 드디어 그 백성들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몰고 말았다.『대제왕조(大帝王祖)』는 독재와 전제왕조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끝나자, 그런 것은 다시는 생기게 하지 않으리라고 사람들은 굳게 다짐하였다. 자치에 대한 생각은 예부터 스웨덴에는 깊이 뿌리내려 있었고, 그것은 다시금 강력한 주장과 함께 꽃이 피었다. 왕의 권력에 강렬한 변화를 가져오는데 알맞은 때가 이르렀다. 찰스 12세 후, 왕위계승 문제는 명확함이 없어서, 그 결정은 인민의 손에 옮겨졌다.

 

 

찰스의 형제 중에서 넷은 모두 어려서 죽고, 그 두 자매 중에서 동생만이 아직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언니는 아들을 하나 남겨 두어서, 이아들도 왕위를 요구 하였다. 국회가 왕위계승문제를 결정하려고 귀족원에 소집되어, 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를 합법한 군주로 받아들이는데 는 동의하였지만, 여왕이 절대 주권에 대한 요구는 모두 버린다는 것을 밝힌 서류에 서명하는 조건으로만 동의 하였다. 올리카는 여기에 동의하여 왕위계승의 권리를, 말하자면 그 주권의 일부를 팔아넘기고 얻어서, 간단히 스웨덴을 한정군주국(限定君主國)으로 만들어 버렸다.

 

 

스웨덴의 『자유왕조 (自由王祖)』라고 불리는 때는 이렇게 끌어들여지고, 의회는 이제부터 전제지배(專制)를 끌어 들이고자 하는 지배자는, 모두 그 왕관을 잃는다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은 평의회의 도움으로 왕국을 다스리기로 약속하고, 권력은 여왕과 평의회가 국회사이에 나누어져, 국회는 네 계급 곧 귀족, 제사(齊), 시민, 농민에게서 이루어졌다. 국회는 법률을 만들어, 평의회를 임명하는 권리를 보류는 하였으나, 3년마다 소집되는 것뿐이어서, 실지 권력은 귀족계급에게 있었다.

 

 

전쟁으로 피폐된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면, 먼저 도는 돈(통화)문제를 해결하여야만 하였다. 도는 돈은 전쟁에 드는 비용을 대기 위하여, 또 에르쯔당 때문에 마구 찍어내어, 벌써 도는 돈으로서의 값어치를 잃고 있었다. 에르쯔는 싸움에 드는 비용을 대기 위하여 단순하게 구리돈(동화) 백만 개를 만들고, 거기에 「은(銀) 1 다레루」라고 새겨 넣고, 시장에서는 은 「1 다레루」로 쓰게 하였다. 그 수는 드디어 4천 2백만에 이르러 마침내 정화(正貨)는 거두어들이고 긴급화폐와 바꾸어졌다.

 

이 일은 나라의 상업을 굳게(마비)하였고, 다급한 문제는 긴급화폐를 거두어 들여서 돈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도는 돈(통화)에 관한 국회비밀위원회에 맡겨진 제안 가운데 하나는 저 젊은 감사관이 내 놓은 것이다.

 

앞으로 나가는데 방해되는 어떤 문제라도 정면으로 겨루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방법이었다. 드디어 그 문제는 그가 일하는 운하에 관계되어 있었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긴급화폐 받는 것을 물리쳤다.

 

 

그는 대용화폐 액면가를 태환(兌換)하고 싶은 자는 25년 동안을 나누어 받는 것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지만, 25퍼센트에서 75퍼센트가 축이 나도(결손)좋다고 하는 자는 10년에서 2년 안에 그 대신 쓰는 돈(대용화폐) 태환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서 낸 것이었지만, 아주 좋은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웁살라 대성당에서 왕관을 쓴 3월 17일에 불어온 봄바람은, 새롭고 시원한 희망찬 것이었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도 새 여왕 앞에 나아가서 무릎을 굽히고 경의를 표하는 무리에서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최근에 그가 지은 책을 지니고 와서, 그 대관식 날에 공손하게 여왕에게 바쳤다. 그것은 『아주 오랜 옛날(태고)의 물높이(수위)와, 급하고 거센 미세기 흐름(조류)』 이라는 제목을 붙인 - 그때는 지질학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 지질에 관한 논문이었다.

 

이어서 5월 26일에 스베드베리 가족은 귀족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물론 스베덴보리가 여왕에게 드린 논문에 적힌 축사 때문이 아니고, 감독의 가족에게는 모두 귀족의 칭호를 주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여왕은 같은 때에, 그를 노상 따라다니는 신하 148명을 귀족계급으로 끌어올려서 더욱 더 농민계급에 대한 귀족계급의 힘을 세게 하였다. 스베드베리의 이름은, 이제는 스베덴보리로 바뀌고, 임마누엘은 비로드의 쿠션을 붙이긴 했지만, 사치와는 인연이 먼 귀족원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나중에 스베덴보리 집안의 문장이 구리판에 기름으로 그려져, 저 아름다운 집회소의 홀에 걸리게 되었다.

 

울리카는 1년 남짓, 단독으로 나라를 다스린 후에, 자리를 남편에게 물리고, 남편은 모두의 동의를 얻어 후레데릭 1세로서 스웨덴 왕위에 올랐다.

 

자리를 물려준 이유 중의 하나는, 러시아의 우협에서 나라를 건져낼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1719년 [31세] 여름, 오랫동안 두려워하였던 연안공격이 시작되었다. 전함 30척과 갈리선 150척을 이끌고 러시아는 스웨덴 연안의 도시들을 쳐들어와서 아름다운 집들을 차례로 약탈하고 불태워 흔적도 없게 하였다.

 

8월 13일에는, 대담하게도 스톡홀름까지도 공격하였지만, 쉽게 물리쳤다.

 

 

2년 후, 영국의 조정으로 평화가 회복되었다.

 

여왕들은, 저들에게 바친 책은 좀처럼 읽지 않는데,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도 『지난날 스웨덴은 물로 덮여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스베덴보리의 『물높이(수위)』를 읽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여왕은 그가 다스리는 땅을 처음으로 지질학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하는 논문을 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곳에는 윤이 나는 쑥돌(화강암)이, 다른 곳에는 모래바위가, 또 다른 곳에서는 진흙돌(점판암), 회돌 바위(석회암)가 차례차례로 켜를 이루고, 서로 어긋 매겨져서 일정한 규칙으로 드러난 아주 흥미로운 땅이었다. 이 논문을 지은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차린 맨 처음 사람인 것을 여왕은 알 수 없었으리라. 스웨덴의 모래와 자갈의 큰 지붕이 남북으로 거의 정확한 나란히금(평행선)으로 뻗어 있고, 그 지붕 사이에는 모래가 켜를 이룬 넓은 지역이 있고, 그 모래 켜의 여기저기에는 여러 가지 빛을 한 진흙이 훌륭한 짝 맞춤을 하여 널려져 있다. 아마도 여왕은 이 논문을 쓴 젊은이가, 비길 데가 없는 재능이 있는 과학자라는 느낌을 잡지 못하였을 것이다. 보기를 들면, 그는 널찍한 곳 여기저기에 넓적하고 커다란 돌덩이가 때로는 집채만 한 것이, 마치 거인이 장난삼아서 제멋대로 거기에 던진 것처럼 누워있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 돌을 농사꾼들은 『트롤카스트(trolkast) 라고 부르고 있는데, 옛날에 바위굴 집에서 살던 거인들 (trolls)이, 예배당이 너무 많이 세워지는데 화가 나서, 이 알돌(옥석)로 때려 부수려 하였지만, 그다지 성공은 못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현상은, 그에게 해명을 조루는 본뜬 글자(상형문자)요, 수수께끼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서 생긴 것일까? 왜 육지 깊숙한 곳에 물고기 화석의 유물이 있으며, 산 옆구리에 커다란 둥근 구멍이 마치도 모두가 말하는 대로 거인이 커다란 손으로, 그 큰 솥을 놓으려고 도려낸 것처럼 보이는가.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커다란 덩어리가, 본디 그 일부분이었던 산에서 수백 마일이나 되는 그곳까지, 어떤 힘이 옮겨오고 하였을까.

 

 

스베덴보리는 그 대답을 이론과 성경에서 찾았다. 이론은 그에게, 모래와 진흙바위로 된 수성 층은 물속에 있다가 나중에 굳어져서 돌이 된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가 킹네크레 산에서 엄청나게 발견한 「벌레」의 화석을 감싸고 있는 백토질(백악질))켜는, 전에는 흙탕물이어서, 거기에 그 작은 동물들이 살다가 죽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거대한 바다는, 아주 오랜 옛날, 지구의 거지반을 덮었을 것이 틀림이 없는 노아의 홍수와 같다고 말을 맺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잘못됨이 없다는 생각이 그를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론과 하나님의 말씀이 잘 어울리게 하려고 하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품은 마음의 특질이었다. 「물높이」안에는, 그가 결코 하지 않은 일, 곧 아주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는 것과, 높아가는 이해에 언제나 적응하도록 고치어져 가는, 그의 생각하는 법이 밝히 나타나 있다. 그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들은, 온 세상을 모두 덮어서,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창조 하신 것 모두와, 뭍에 살던 모든 생물을 함께 멸망시킨 대홍수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노아가 방주(배)를 마련하지 못했다면, 땅에 살던 모든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었으리라. 이 대홍수가 땅을 덮어버린 것을 아니라고 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지만, 그러나 세상의 지혜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내용에 한마디 말을 끼워 넣고자 한다. 그래서 그 여자(그 지혜)는, 그 홍수가 뒤에 남기고 간 것을 조사하여, 거기에서 그 증명을 모으는 것이다……. 나는 그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또 진리를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주장도 하고 증명도 한 것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해석되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지나서 쓴 편지에서, 이 생각을 그가 고친일은 주의할 만하다.

 

마침내, 그 막대한 수의 화석이 겹쳐 쌓인 것을 풀어 밝히는데, 1년이란 너무나 짧은 것이었다. 그에게 땅의 구조는, 큰 바다가 전에는 땅보다도 놀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모래와 자갈의 지붕은 강력한 미세기흐름(조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 미세기 흐름이 동쪽과 서쪽으로 빠져나가고, 밀려오고 하는 사이에 흔들리며 움직이는 물 때문에, 모래와 자갈이 겹쳐 쌓여서 산(山) 도랑이 되었다고, 그는 설명하였다.

 

 

이 아름답고 읽기가 쉬운 작은 책자에서, 스베덴보리는 킹네크레 산을 이루고 있는 모래바위와 회돌 바위 꼭대기에 있는 굳은 돌 층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것도 또한 물속에 모아져서, 나중에 쑥돌바위(화강암)로 굳어진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

 

 

이 논문은 여러모로 비판될 것이다. 그렇지만 뒷날의 과학자들은, 실로 스베덴보리를 지질학이라는 독립된, 한 과학에, 직접으로 영향을 끼친 선구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인정을 하고 있다. 『지질학자로서의 E. 스베덴보리』를 쓴 A. G 나르트호스트 교수의 말을 인용해 보자. 『스베덴보리가 지질학 얼안(분야)에 끼친 것은, 그것만으로도 그를 존경하기에 넉넉한 과학자의 명성을 확보시키고, 또 그가 맨 높은 자리에 앉을 천재적 탐구가인 것을 입증할 만치 뜻있고 또 광범위한 것이고, 그 날카로운 관찰력은 무엇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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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스베덴보리의 공헌은 물리학뿐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사람 몸의 신비에도 바쁘게 향하고 있다. 그는 물리학과 역학의 법칙은, 하나의 기계와 같은 논문 안에 발표되고, 그것은 나중에, 『떨림(진동) 또는 사람의 가장 정묘한 성질의 해부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물리학에서 해부학으로 옮긴 것은, 그가 「다에다루스」 제 6호에 실린 작은 논문을 생각한다면, 별로 엉뚱한 것은 아니다. 이 예비적인 논문은, 떨림에 관해서 몇 개의 정칙(定則)을 내보이고 있다. 첫 번째 법칙(정칙)은, 고체는 무엇이든 아주 작은 맞닿음(접촉)으로도 떨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떨림을 넘겨주는 가장 좋은 매개체는 음악에 쓰이는 줄 같은 긴장된 엷은 막(멘 브레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물이의 법칙을 사람 몸을 해부하는데 옮겨 써서, 그 생명력은 떨림에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말(언어)은 줄 소리와 같이 떨림일 뿐이고, 뜯는다는 것은 이런 떨림이 모여 쌓인 것이 막을 지나서 머릿골(두뇌)로 흘러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은 다른 모든 감각에게도 말할 수 있다. 몸의 어떤 부분에 닿아도 그 지각은 머릿골의 굳은 막, 연한 막에 전하여 질 수 있고, 이것은 힘살과 신경이 서로 걸려 얽힌데 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고, 신경은 뇌막 안에 끝을 내고, 신경의 모든 것은 이러한 엷은 막이 짜 맞추어서 된 것에 의하여 쌓여 있다.

 

「떨림」을 다룬 더 큰 저술은, 그와 같은 생각을 더 자세히 다루었다. 앞서의 논문에서는 그 떨림을 바깥쪽의 깨닫기관(지각기관)에서 일어나서 머릿골에 이르고 있다고 하는 인상을 주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은 먼저 몸속 유동체 안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주로 입증하고 있다.

 

 

이 논문은 그 때 결성하지 얼마 안 되는 웁살라 문헌협회 모임에서 발표가 되었다.

 

 

학자들은 그의 생각에 대단한 흥미를 보이긴 하였으나, 반드시 그것에 동의한 것은 아니 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벤세리우스에게, 나는 그들의 비평을 간절히 바랐는데, 그 반대의견에서 내가 바른길에 서 있는지, 그릇된 길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라고 전하고 있다. 『나는 협회원들이 젖내 나는 치우친 생각을 버리고, 이론에는 이론으로써 맞붙고, 증명에는 증명을 내 놓아서, 그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서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새 발명이, 또는 아직 실험의 단계를 밟지 않은 논리가 인정을 받기 까지는, 증명, 그 증명만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해부학 책을 쓰는데서 자세하게 정혼을 다하여 전개하기로 되어 있는 훌륭하고 새로운 합리적 원리에, 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주의가 불러 일으켜지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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