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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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부모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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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부모

 

임마누엘이 한 평생의 사업은 강건한 체격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어졌다. 아버지 에스바 스베드베리는 다레카루리아의 농부오하 탄광부출신이었다. 에스바의 아버지 다니엘 이삭손은 오랫동안 폐광으로 있는 구리광산 소유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 광산은 개량된 채광방법으로 다시 채광이 되어 막대한 재산을 얻게 되었다. 이삭손은 뜻밖의 행운으로 아들 에스바를 스웨덴 대학에 보내어 신학공부를 시킬 수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가졌으며, 그것은 “스베덴”이라고 불리는, 화룬 근처에 있는 경치가 좋은 작은 시골 땅인데, 거기에서 스베드베리라는 이름을 땄다.

 

에스바는 최근에 근위기병대 사령부 교회사(敎誨師)로 임명을 받아, 거기서 병사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친 것이 왕의 호감을 얻게 되었다. 찰스(칼) 11세는, 에스바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마음을 다하여 가르치는 것을 내놓고 칭찬하였다.

 

그 때는 지금에 비하면 모두가 경건하였지만, 에스바는 말 그대로 경건 이상이었다. 그는 단순히 교회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경건한 믿음의 길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에 반발하고, 참 믿음은 적극적으로 유익한 일에 관계하는 삶과 떼어 놓을 수가 없고, 그렇지 않으면 그의 표현대로 라면, “머리의 믿음은 악마의 믿음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시대의 퇴폐한 도덕을 한탄하여 귀족이든, 신분이 낮은 사람이든, 그들 중에서 도덕에 어긋난 일을 보게 되면 꾸짖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신에겐 원수가 많겠군.”하고 왕은 어느 날 그에게 말했는데, “원수가 없는 주의 종은 별 것 아닙니다.”라고 스베드베리는 대답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성격을 밝히 보여 주는 대답이었다.

 

이 젊은 교직은 스톡홀름에 있는 동안에 부유한 광산국 감사관, 알부레슈트 베엠(Albrecht Behm)의 딸 사라를 만나 그와 혼인을 했다.

 

그는 혼인하지 여섯 달 뒤에 열여덟 살의 신부와 헤어져 열 달 동안 대륙 여행을 떠났다. 교양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 이었다. 이런 일은 그때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에스바의 경우는 아내의 막대한 재산으로 아주 쉽게 여행할 수 있었다.

 

임마누엘의 어머니, 사라 베엠은 기질이 얌전하고, 용모가 뛰어나고, 품성이 고결한 부인이었다. 그 여자는 경박한 시대에 부유한 집 딸로 태어났지만, 화려한 옷차림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실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 부인은 그때의 유행을 따르는 일이 없었는데, 이것은 남편의 기쁨이기도 했다. 그는 유행을 미련한 허영이라고 물리쳤기 때문이다. 사라는 동정심이 많아서 자선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1692년, [4세]※ 봄에, 에스바는 빙에켈(Vingaker)교구의 목사로 임명되어 시골로 옮겼다.

 

※[] 안의 숫자는 스베덴보리의 나이를 나타낸다.(옮긴이 주).

 

그러나 일 년도 못되어서 왕은 그를 웁살라 대학의 신학교수로 승진시키고, 후에는 대성당 수석사제로 임명했다. 그래서 가족은 스톡홀름에서 39마일 쯤 떨어진 경사가 완만한 평원지대인 우푸란드에 있는 학문의 발상지인 웁살라로 옮겨갔다.

 

여기에서 임마누엘의 새 생활이 시작 되었다.

 

스베드베리 집 사람들에게는 행복과 화합이 뒤따랐다. 웁살라에 자리 잡고, 새로 부임한 목사는 그 거리의 중심 너른 마당에 돌로된 큰 집을 짓고 훌륭한 뜰을 꾸몄다.

 

어떤 작은 일이라도 흐트러진 마음으로 하지 않았으며, 모두를 즐거운 마음과 기쁨으로써 일했다. 성난 소리도, 가시 돋친 소리나 입씨름도, 어느 것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집은 얼마 못가서 불에 타버렸다. 곧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집이 완성되자, 스베드베리는 교구의 상류계급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들을 시중들고, 그 정이 넘치는 잔치는 감사와 서로가 축복하는 말로 끝났다. 스베드베리는 활기찬 생활을 보냈다. 그는 많은 구실(직책)을 다하는 중에도 스웨덴 말로 된 옛 성서를 고치는 일도 하였다.

 

그러나 성서위원회에 속한 다른 사람들의 질투 때문에 고침판(개정판)은 출판할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맞춤법 말고는 바로 잡을 필요가 없다고 그들은 완강하게 주장했다.

 

그 후, 스베드베리는 - 그 자신 훌륭한 찬송가 노랫말을 지었지만- 옛 찬송가를 고치려고 시간과 돈을 썼지만 그것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 주된 이유는, 자기들과 그 일을 의논하지 않았다고 감정이 상한 목사들 몇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수석사제를 이단이라고 하며, 새 종교를 끌어 들이려 한다고 몰아붙였다. 아마도 그것은 이 수석사제가 구주예수를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고,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이었다. 그가 출판한 찬송가는 모두 몰수되었다.

 

교육자인 스베덴보리 아버지의 결점은 어떻든 간에- 일천 쪽이 되는 자서전을 보면 그의 사람됨(자아성)을 보여 주는 곳이 적지는 않지만- 그는 따뜻하고 우정에 넘친 사람이고, 가장 좋은 효과는 채찍이 아니라 학생들의 흥미를 끄는 게임과 겨루기에 의하여 얻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를 사랑했다.

 

임마누엘의 생애 초기에 관해서는 그 자신의 수기가 남아 있다. 그는 어렸을 때의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4살에서 10 살까지 끊임없이 하나님, 구원, 영적인 사람의 병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여러 번 여러 가지 일을 말했는데 부모는 이에 놀라서, 천사가 나를 통하여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6살에서 12 살 까지는 자주, 기꺼이, 신앙에 관하여 교직자들과 말을 나누었는데, 믿음의 생명은 사랑이요, 생명을 주시는 사랑은 이웃을 사랑 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신앙을 주시지만, 그러나 그 사랑을 실행하는 자만이 신앙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스베드베리 수석사제는 1719년,[31세], 귀족에 편입되어 그 때부터 스베덴보리라는 가족 명을 갖게 되지만, 편의상 임마누엘을 스베덴보리로 계속하여 부른다.

 

임마누엘 최초의 친필로 알려진 것은 그의 사촌형제인 요한 모레아에우스가 그에게 준 희학논문에 쓰인 것이다. 모레아에우스는 의학을 전공하는 동안, 그 목사 집에서 살면서 아이들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스베덴보리는 아마도 모레아에우스의 영향을 받아 사람 몸에 놀라운 관심을 쏟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1692년 [4세] 그해 4월, 맹렬한 추위가 덮쳤고, 가을에는 쉬지 않고 비가 내리고, 농작물은 망가졌다. 다음해 농사도 봄에 내린 많은 눈과 여름 가뭄으로 엉망이 되었다.

 

1694-1695년[6-7세], 이상하게 호된 겨울 추위로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이 위협을 받아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주린 배를 채워야만 했다. 사라 베엠은 이 재해에도 불구하고 자기 가족의 안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제돈 으로 구호소를 세워 구호사업을 하였다.

 

사라의 가족도 지금은 대가족이 되었다. 임마누엘 다음에도 아기가 6명이 더 태어나 모두 9명이 되었다.

 

생각지 않은 비극이 이 가족에게 일어났다. 사라 베엠은 1696년[8세], 6월 17일 열병에 걸려서 죽고, 또 열흘 지나서, 이상한 재질이 많은 형 알베르트도 같은 병으로 쓰러져 대성당 본당의 어머니 곁에 묻혔다.

 

사라 베엠이 죽은 후, 스베드베리 수석사제는 아주 선량한 기질과 견식을 지닌 부유한 홀어미(미망인)와 재혼했다. 두 번째 어머니 사라 베르이아(Sara Bergia)는 임마누엘을 퍽이나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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