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예루살렘 사대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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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관하여

  • 관리자 (ecclesias)
  • 2017-12-23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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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14.12.219
양심에 관하여

 

지금은 양심(良心.conscience)이 무엇인지 다루고자 한다. 양심은 그 사람 자신 안에 이것에 속한 영접, 수용에 일치하여 그의 종교적인 종지로 말미암아서 한 사람 안에 형성된다.

 

교회에 속한 사람에게 양심은 성언에서 비롯된 믿음에 속한 진리들에 의하여 형성되고, 또한 심령 안에서 이런 것들의 영접, 수용에 따라서 성언에서 끌어내진 교리에서 비롯된 믿음에 속한 진리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믿음에 속한 진리들을 알고,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이해할 때, 그리고 그 뒤 그것들을 원하고, 그것들을 실천할 때, 그 때 양심은 그 사람 안에서 형성되어지기 때문이다. 마음에서의 수용은 곧 의지 안에서의 수용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의지는 그 사람의 “마음”(heart)이라고 불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것은 마음에서부터 말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행한 것은 마음에서부터 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분할되지 않은 마음(=깨지지 않은 마음. an undivided mind)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참된 것이라고, 그리고 선한 것이라고 믿는 것과 일치하여 행동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들이 이해하는 것과 일치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다 더 완전한 양심은 믿음에 속한 진리들 안에 있는 다른 자들에 비하여 더 조요된 자들에게 가능하고, 그리고 다른 자들에 비하여, 그리고 덜 조요된 자들 보다는, 또는 불 영명한 지각에 있는 자들에 비하여 보다 더 명확한 지각의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더 가능하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를 받은 자들은 양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양심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 의지에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애에 속한 선이 새로운 의지를 완성하기 때문에 인애에 속한 선은 역시 양심을 완성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9113항 참조), 양심은 믿음에 속한 진리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또한 새로운 의지 역시 인애이기 때문에 여기서 뒤이어지는 것은 믿음에 속한 진리들에 반대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 된다고 하겠다.

 

주님에게서 온 믿음과 인애가 사람의 영적인 생명을 완성하기 때문에, 얻는 결론은 양심에 거슬러 행동한다는 것은 곧 영적인 생명에 거슬러 행동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양심에 거슬러 행동한다는 것은 새로운 의지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고, 그리고 인애에 거슬러서, 그리고 믿음에 속한 진리들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이 양심에 일치하여 행동하는 경우 그 사람은 평화에 속한 평온(平穩)의 상태에 있고, 그리고 내적인 지복(至福)의 상태에 있다는 것에서 아주 명확하다. 그리고 만약에 그가 양심에 거슬러 행동한 경우 내적인 상태가 평온치 않은 상태에 있고, 고통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고통이 바로 “양심에 속한 침들” (=양심의 가책)이라고 한다.

 

사람은 선한 것에 속한 양심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정의로운 것에 속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 선한 것에 속한 양심은 속사람에 속한 양심다. 그리고 정의로운 것에 속한 양심은 겉사람의 양심이다. 선한 것에 속한 양심은 내적인 정동에서 비롯된 믿음의 계율에 일치하여 행동하는 것에 존재하고, 이에 반하여 정의로운 것에 속한 양심은 외적인 정동에서 비롯된 시민법이나 도덕률에 일치하여 행동하는 것에 존재한다. 선에 속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역시 정의에 속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직 정의에 속한 양심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선에 속한 양심을 수용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더욱이 그들이 가르침을 받을 때 그것을 받는다.

 

양심이 무엇인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만약에 다른 것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사람은 자신의 소유 안에 있는 다른 것의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따라서 법률이나 명예나 명성 따위의 상실(喪失)에 대한 어떤 두려움 없이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것이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자른 자에게 그것을 되돌려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선한 것을 목적해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정의로운 것을 목적해서 정의로운 것을 행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의 능력 가운데서 매우 높은 위치에서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가능할 수 있고, 자신의 나라를 위하여 보다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그리고 그 자리를 자신의 나라를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다면 그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경우들에게서도 그러하다.

 

이런 예들로부터 양심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성품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겠다. 그것들은 그 정반대에서 알 수 있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편의를 목적해서 정의로운 것처럼 나타내기 위하여 불의한 것을 행하고, 그리고 선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악한 것을 행한다. 그리고 그 반대도 행한다. 그들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의를 행한다는 것이나 악을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자들 중에서 몇몇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한다면, 양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만약에 가르침을 받는다고 해도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이 세상을 목적해서 모든 것을 행하는 자들이다.

 

이 세상에서 양심을 영접, 수용하지 못한 자들은 저 세상에서도 양심을 수용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천계에 있는 수준이나 상태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계를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입류가 불가능하고,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역사(役事)할 수도 없고, 그것들을 그것 자체에 그와 같이 그려 보여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양심은 천계의 입류를 받는 수준(=지평.plane)이고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세상에서 이런 부류의 인물들은 모든 것들에 비하여 자기 자신들이 이 세상적인 것을 월등하게 사랑하는 자들과 무리를 이룬다. (9112-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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