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예루살렘 사대교리

새 예루살렘 사대교리

오늘날 일반적인 견해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이웃이라는 것이다

  • 관리자 (ecclesias)
  • 2017-12-19 19:55:00
  • hit83
  • vote4
  • 119.207.135.45

오늘날 일반적인 견해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이웃이라는 것이다

 

제일 먼저 이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설명하여야 하겠다. 그 이유는 인애가 사람은 누군가에 대하여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인애는 선한 사람에게 실천되는 것과 같이, 같은 방법으로 악한 사람에게도 아무런 차별이 없이 행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의한 인애는 전혀 인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선행의 미덕에 의하여 악한 사람은 이웃에게 부도덕한 나쁜 짓을 자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이웃에게 도덕적이고 좋은 일을 실천한다.

 

오늘날 일반적인 견해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이웃이고 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견해는 사람의 삶의 됨됨이를 연구하고, 또 그것과 더불어 일치하는 인애를 실천한다는 크리스천의 타산적인 잔재주 일 뿐이다. 내적인 교회에 속한 사람은 판단력을 가지고, 따라서 지성적인 존재로 이것을 실천하는 반면, 외적인 교회에 속한 사람은 이와 같은 판단력을 가지고 실천할 수 없고, 그 사람은 다만 무분별하게 이것을 실천한다.

 

고대 사람들은 이웃을 계급별로 분류하여, 특별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들어나 보여 지게 하는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들에 따라서 그 각각의 계급을 이름 지어 불렀으며, 또 그들은 같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인애가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 또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인애가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교리를 질서에 맞게 적응 시켰고, 그것에 일치하는 삶을 살게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의 교리는 삶에 관한 법칙들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그것에 맞게 그들은 그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의 성품을 살피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속뜻으로 그 교회의 순수한 교리에서 비롯된 인애의 실천에 따른 것인지, 또는 그 자신이 바꾸어 놓은 교리에서 비롯된 인애의 실천에 따른 것인지의 식별력을 가지고 교회에 속한 사람의 이런 또는 저런 성품을 살펴서,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은 늘 결백한 것처럼 보이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삶을 변호하려고 하고, 그러므로 교리에 속한 법칙들을 그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설명하거나, 또는 필요에 따라 바꾸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속한 사람이 인애의 성품을 알기 위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이웃에 관한 차별을 식별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와도 함께 하는 선에 일치 하여 다종다양하게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에, 주님은 가장 높은 뜻으로 우리의 이웃이고, 또 가장 월등한 계도에서도 이다. 그리고 주님에게서부터 이웃은 시작된다. 이렇게 볼 때, 뒤이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나 주님에 속한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에 정비례하여 그 사람이 이웃인 것이다. 꼭 같은 방법으로 주님을 영접한 두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즉 주님에게서 비롯되는 선을 같은 방법으로 받는 두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꼭 같은 방법으로 이웃인 두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외 없이 천계들이나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선에 있어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두 사람에게 서로 꼭 같은 선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신에 의하여 존재할 각자들을 위한 질서의 변화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두 불일치하는 다양성, 따라서 이웃에 관한 상이한 등차를 식별한다는 것은 주님의 영접에 일치한다는 것, 즉 주님에게서 비롯된 선에 속한 것을 수용하는 것에 일치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일반적이고, 따라서 그들의 종이나 이것들에 속한 어떤 류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천사에게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그가 알고 있는 것에 일치하여 사는 것 이상의 그 어떤 것도 결코 요구하시지 않는다.

 

이상의 모든 것에서 볼 때 명확한 것은, 크리스천들의 선에 속한 성질은 각자가 이웃이라는 계도 안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이 주님의 것이고, 주님께서는 선의 성질에 따라서 현존하시고, 또 주님은 선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이웃의 기원이 주님에게서만 비롯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등차에 관한 식별 역시 선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에 일치하여야 한다.

 

이웃이 선의 성질에 일치한다는 것은 강도 만난 사람에 관한 주님의 비유 말씀에서 명백하다. 그가 반쯤 죽게 되어 있을 때 제사장도, 레위 사람도 지나갔지만,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 그의 짐승에 그를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와서, 그를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인애에 속한 선을 실천하기 때문에, 그가 “이웃”이라고 불렸습니다. (누가10:29-37). 그러므로 잘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선 안에 있는 이웃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악 안에 있는 사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다른 방법에 의하여, 사실은 이웃이다. 왜냐하면 이런 이유로 해서 그들은 서로 상이한 방법으로 보탬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내용에 관해서는 주님의 자비로 뒤에 더 설명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웃이 다고 결론짓는 것은 선에 속한 성질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웃은 선을 실천하는 바로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에 속한 것이 아니면, 어떤 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랑에서부터 모든 선은 비롯되고, 또한 이 사랑에서부터 선에 속한 성질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이웃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각 사람은 그의 사랑의 성품에 따라서 이웃이라는 명제는 자기사랑(自我愛)안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여실히 보인다. 이들은 그들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이웃으로서 시인한다. 즉 그들이 그들의 것인 만큼, 따라서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것만큼, 그들은 그들을 포옹하고, 입 맞추고, 또 그들에게 좋은 것을 나누고, 형제자매라고 부른다. 아니, 그들은 이들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에 일치하여, 따라서 사랑의 성품과 크기에 따라서 이웃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이웃의 기원에서 유래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은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과 같은 경우인데, 그들이 모든 것보다 으뜸으로 사랑하여야 할 주님에게서 비롯된 이웃의 기원을 갖는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 사랑에 대한 그 사람의 사랑의 성품에 따라서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 같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들은, 특히 천사들과 꼭 같이 자기 자신들 보다도 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에게서 비롯된 이웃의 기원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왜냐하면 주님자신이 선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사랑의 성질이 누가 이웃인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주님께서 선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주님 스스로 마태복음서에서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선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들은 “먹을 것을 그분에게 주었고” 또 그들은 “마실 것을 그분에게 주었고, 그분을 맞아들였고, 그분에게 입을 옷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분을 찾아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뒤에 “또 그분의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그들이 그분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 25:34-40).

 

이상의 모든 것에서 볼 때, 명확한 사실은 이웃의 기원은 교회에 속한 사람에 의하여 도출된다는 것이고, 또한 사람은 누구나 주님에게 가까이 있는 정도에 따라서 이웃이 되는 것이고, 또한 이웃은 선에 속한 성품에 일치한다는 것, 즉 인애에 속한 성품에 일치한다는 내용 등이 되겠다.(6703-6712)

게시글 공유 URL복사 cy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