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모양과 형상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

상태에는 두 종류가 있다.

  • 관리자 (ecclesias)
  • 2018-01-01 10:02:00
  • hit156
  • vote0
  • 119.207.135.45

상태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공간에 대응하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에 대응하는 상태이다. 공간에 대응하는 상태는 존재(存在)에 관한 상태이고, 시간에 대응하는 상태는 실재(實在)에 관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되게 만드는 것은 두 가지 것이 있는데, 다시 말하면 “존재”와 “실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존재는 주님에게서 비롯된 영원 존재에 속한 수용 그릇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영들, 천사들도 모두 주님에게서 비롯된 생명의 수용그릇이요, 또한 수용하는 형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이 수용은 실재가 서술되는 쪽에 존재한다. 사람은,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리고 이 존재는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존재하는 그 사람은 다만 실재하는 것, 즉 생성하는 것 뿐이다. 존재는 오직 주님 안에서만 존재하는데, 이를 가리켜 “여호와”라 불렀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여호와이신 존재에게서 생성 되었다. 그러나 주님의 존재, 즉 여호와께서는 결코 어느 누구와 교류 할 수 없고, 다만 주님의 인간과만 교류 할 수 있는 존재이시다. 이 인간이 이 신령존재, 즉 여호와가 되신 것이다. 주님께서 양쪽의 본질의 측면에서 여호와이시다는 것은 다음의 항에서 읽을 수 있겠다.

(1736.2004.2005.2018.2025.2156.2329.2921.3023.3035)

 

실재 역시 주님에 관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신령한 것을 입으셨던, 이 세상에 계셨을 때 만 그러하다. 그러나 주님께서 신령존재가 되신 뒤에는 실재는, 그분에게서 비롯된 어떤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그분에 관해서 서술 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은 주님 안에서 실재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주님 안에 있지 않고, 오히려 주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 영들, 천사들을 현현(顯現)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을 살게 한다. 사람,영, 천사에게서 실재는 살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살아 있는 것은 영원한 행복이다. 영원한 삶에 속한 행복은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의 신령존재에서 비롯된 영원에 존재한다. 영생에 속한 행복이 속뜻으로는 “축복”이 뜻하는 것이고, 겉뜻으로는 애정에 속한 기쁨이 뜻한다는 것은 부연 설명이 없이도 명확하다.

 

 

영생에 속한 행복은 진리나 선들의 애정에 속한 기쁨이다. 모든 애정은 자신들의 기쁨을 소유한다. 그러나 모두가 동일하지 않고, 애정이 여하 하듯이, 기쁨 또한 각각이다. 악이나 거짓에 속한 정욕 역시 자신들이 쾌락을 소유한다. 사람이 중생이 시작되기 전이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진리나 선에 속한 애정을 받기 시작하기 전에는, 이러한 쾌락들은 오직 유일한 기쁨들로 나타나 보이고, 그러므로 사람들은 또 다른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결과적으로 만약 이런 쾌락들이 자신들에게서 박탈된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소멸한 것이라고 믿을 정도다.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진리나 선에 속한 기쁨들을 받는 사람은, 그들이 절대적인 기쁨이라고 믿었던, 종전의 그들의 삶에 속한 기쁨의 본성이 상대적으로 값어치 없는, 비도덕적이고, 실로 불결한 것이라는 것을 점차적으로 깨닫고 이해한다.

 

 

그리고 사람이 진리에 선에 속한 애정이 기쁨 속으로 진전하면 진전 할수록, 그 사람은 값어치 없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악이나 거짓에 속한 쾌락에 관하여 심사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것들이 몹시 불쾌한 혐오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더 상세하게 영생에 속한 행복에 관하여 숙고하면, 이 세상에서 일생을 사는 동안, 선이나 진리에 속한 애정 안에 있는 사람은 쾌락을 지각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을 대신에 확실한 기쁨을 지각 할 수 있다. 사람이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세상적인 걱정이나, 여기에서 비롯된 근심 따위에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은 걱정, 근심은 그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영생에 속한 행복을 가로 막는데, 이런 이유는 다른 방법에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행복이 사람 안에 있는 것에서부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걱정이나, 근심 따위에 흔들리면, 그것은 거기에 있는 걱정이나,근심 따위에 휩싸이게 되고, 그리고 그것은 일종이 애매한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축복이나 행복 안에 있는 하나의 기쁨이다. 이런 유이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는 만족한 행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육신을 벗게 되면, 그리고 이와 동시에 세상적인 걱정이나 근심 따위을 벗게 되면, 그 사람의 내면적인 사람 안에 애매하고 불영명에 속한 감추어져 있던 행복은 그 자체를 현현(顯現)하게 드러낸다.

 

 

애정은 사랑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애정은 사랑에 속한 연속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악이나 거짓으로, 또는 선이나 진리로 감동 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그 사람에게 속한 일반적이 것이나, 개별적인 것들 안에 현존하고, 또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으로 지각되지 않고, 오히려 자기 가지고 있는, 직접적인 사안에 따라서, 또는 그 사랑의 상태나, 그것들의 변화에 따라서 다종다기하게 변화하고 있고,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그가 원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 안에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애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사랑이 계속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속한 계속적이 것은, 사람의 생명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기쁨으로 만들며, 종국에는 자기 자신의 생명 자체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은 그의 애정에 속한 기쁨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고 때문이고, 따라서 그의 사랑에 속한 애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이 원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된 그의 생각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에 의한 그의 행하는 것이다. 3938

게시글 공유 URL복사 cyworld